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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가 악의 상징인 이유


내일 일은 난 모르겠다며 술에 떡져 누운 형상인
새벽 방콕의 카오산로드를 떠나
나와 여행자 B가 태국의 어느 섬으로 갔을 때의 일이다. 
그 섬은 거대 기업 리조트 시설과는 전혀~ 거리가 먼,
태국 현지인들이 '해수욕'을 하러 가는 상당히 로컬스러운 섬이었다.
(그래도 우린 그 섬을 무척 사랑하고 아꼈으며 지금도 내 마음에 지구 상의 가장 멋진 섬으로 남아있다.)

그 섬까지 가기 전, 우리는 방송 일때문에 하루하루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떠나온 것 자체가 한국에서 직전에 있었던 개편 새 프로 제작 과정에서 시작됐다. 
우리는 갖가지 제안을 내놓다 못 해 결국엔 큰 울화병을 얻었다. 
그리고 태국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사람의 얼을 반쯤 빼 놓는 카오산로드의 밤도 무엇도 
저 깊은 가슴 속 24시간 항상 이글이글 타고 있던 우리의 스트레스를 다 잠재우진 못했다.

우리는 비로소 이 하찮은 섬에 도착하고나서야
현실의 하루하루를 완전히 떠나왔다는 즐거움에 바르르 몸을 떨었다.

'이리 빈둥 저리 빈둥, 순수하게 촌티폭발' 은 그 섬에서 우리들 나날의 목표였다.
바닷가를 보자마자 모래 사장에 대자로 누웠다가, 데굴데굴 굴렀다가, 바다에 들어갔다가,
미친 사람 처럼 웃었다가, 소리를 질렀다가, 
성한 사람도 실성하게 만드는 서로의 천인공노할 섹시 화보 촬영에 전념하기도 했다.
 
여행자 B가 먼저 세 마디로 된 비명을 질렀다.

"앗! 저게 뭐야!!!"

여행자 B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으로 가리킨 그 곳엔
늙을만큼 늙은데다 노련해 보이는 시꺼먼 수컷 흑염소가 노련한 턱수염을 뾰족 세우며
이제 갓 태어난 듯 보이는 아장아장 아기 염소를 덮치고 있었다.
아기 염소는 '이헤이에헤이' 거리며 아장아장 걸으며 낑낑 도망 다니는 걸
그 능글스러운 수컷 염소가 '가긴 어딜 가'라는 듯 앞발을 떠억 하니 등에 걸치며 그 아기를 덮친 것이다.
보기 흉한, 불타는 나무 젓가락같은 것이 보였다 말았다 했다.

추하다는 뜻이 바로 이거구나.

자석의 N극처럼 루돌프의 빨간 코끝처럼 그 벌겋고 흉한 모습은
겨울철에만 보는 죄 없는 루돌프 사슴까지도 싫어지게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1회용 나무 젓가락도 모두 불태워 버릴테다! 

어이구 짜증----

그 흉악한 놈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심하게 대패질을 하는데
(그렇게나 부들부들 떨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토악질이 나지는 않았을 터)

우,     엑,
 
그때까지 보아온 TV 자연 다큐멘터리는 모두 대국민 사기였다.
<동물의 왕국>등등에서 일찍이 보아왔던 동물들의 그 친밀한 교접의 순간도 모두 사기!
월등하게 노련한 중장년의 숫염소와 가녀린 다리로 아둥바둥거리는 어린 아기 염소...

완전히 말 그대로 강제로 당하는 장면이라 너무 뤼얼해서 더 분노를 불타게 하는 광경이었다.
우욱--
우리는 발을 동동 굴렀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숫염소가 너무 악마같고 무서워서
조개껍질 하나라도 던질 힘이 없이
발이 땅에 얼어붙어버린 채 괴성을 지를 뿐이었다.
(지금 같았으면 염소 너는 내 손에 죽었다.)

이것 저것 근본이 다른 서양이긴 하지만 그 때까지도 도대체 알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염소의 얼굴을 서양에서 악마의 상징으로 쓴다는 것이었다.

뭐 솔직히 뾰족하게 얍상스런 수염을 단 얼굴과 탁한 눈빛만 보아도
염소란 녀석이 그다지 예뻐 보일 것 없는 짐승인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그 녀석이 굳이 악마 수준으로 인류에 피해를 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차라리 바퀴벌레나 쥐(그러나 의외로 작은 생쥐는 귀엽게 생겼다), 살모사, 사마귀, 모기...
다른 추천 후보도 못지 않게 많다.
 
딱히 잘못 한 것도 없는 염소가 괜한 미움을 받고 살아가는 동물이 되었구나, 라는 게
그 때까지의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날 이후로 나에게 염소는 악의 상징이 아니라 '악' 그 자체가 됐다.

잠시 뒤 염소의 악이 나에게 빙의됐다.
여행자 B는
그 날 본 것 중에서 가장 독하게 각인된 기억을
악몽으로 꾸는 불쌍한 버릇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계속 염소 사건을 각인시키기 위해 잊을만 할 때마다 염소 이야기를 했다. 
여행자 B의 항의가 이어졌고 (흐흐)
나는 그 이후 "염소"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태국 돈 10밧을 벌금으로 내 놓기로 했다.

물론 나는 10밧짜리 "염소"를 피해
"...증" "...려" "... 세" 등 많은 "염"을 이야기 하고파 했다..


다음날, 이미 염소 사건을 잊어버린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우리 움집, 아니, 우리 숙소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시켰다.
(숙소라기 보다는 움집에 가까운 불쌍한 숙소였다)
B는 '신선한 우유 Fresh Milk'를 시켰다.

B : 이 우유 , 되게 찐하다. 맛이 특이해. 꼴깍꼴깍.
여행유전자 : 그렇구나. 인도 여행때도 시골 식당에서 아침에 Fresh Milk라고 따끈따끈하게 갖다 줬었지,
                   동네 소 젖 금방 짜온 거라고....
(잠시 침묵)
여행유전자 : 그런데... (나도 떨린다) 너 이 섬에서 소 본 적 있냐?
(<유난히 진한 맛이 나는 신선한 후레쉬 밀크>를 입에 머금은 B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여행유전자 : 그러고보니 태국 사람들이 흑염소탕을 먹는 것도 아닌데 왜 염소를 기르나 했...
(긴 침묵)

이미 여행자 B는 <소가 없이 염소만 있는 섬에서 아침에 갓 짜온 유난히 진한 맛이 나는 신선한 후레쉬 밀크>를 반 이상 마신 상태였다. 하지만 포기가 빠른 여행자 B. 그래도 식사 중간에 간간이 한 두 입은 대더니 중간쯤부터는 꼴깍꼴깍 맛있게 마셨다. 역시 식욕의 힘은 악마를 이긴다.

(사진은, 그 날 아침은 아니고, 두 사람이 그 날 밤 먹었던 나름대로 정찬의 기록)

p.s. 혹시 염소가 악의 상징인 역사적 문화적 이유가 궁금하시다면 몇 단어만 검색해도 결과가 나오니 참고하세요. (친절한 듯 불친절한 p.s.)

 

혹시나 싶어 첨언합니다. [클릭]

혹시나 싶어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만 이 글은 ;)

인간의 관점으로 동물의 행위에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서 염소를 악마로 지탄하는 진지한 글이 아니라
여행지의 짧은 순간순간을 오감의 경험과 상상으로
최대한 누리고 즐기고 풍자하고 곱씹어보자는 여행자의 롤러코스터같은 여행기입니다.

'염소가 유아 강간을 했으니 악마다. 이에 문제를 제기한다'가 주제가 아니라
개콘의 씁쓸한 인생 빠른 쌍둥이 버전으로 말하자면

인위적인 리조트 아니야
자연스러운 섬.
스트레스 아웃.
그런데
늙은 숫염소, 아기 염소를 범해.
네 이 놈 악마같은 놈
일회용 나무 젓가락도 싫어져
그런데 염소 놀이 재밌네
염려 염세 염원
아침에도 마셨네
염소놀이 뛰어넘는
염소의 후레쉬 밀크
식욕이 모든 것을 이기네
이참에 염소 악마 상징
역사 문화적 배경 궁금하면
검색해서 찾아보셈^^
끝.

입니다. 그냥 가볍고 즐겁게 섬 여행 떠올리면서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혹시 이런 글도 어디선가 오독이 될까 걱정이 되어 이 참에 자세하게 써봅니다.
저도 글 쓸 때마다 오독의 여지가 없도록 글을 써야 할까 생각이 많아져서
자꾸 사족 달고 그러다보면 설명적인 밋밋한 글이 되려는 경향이 있어
스스로 무척 자제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저 개인적으로는 유머와 비유와 쾌락과 가슴이 찡한 그리움이 뒤얽히는 글을 좋아합니다.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중인데 쉽지 않습니다. ^^
항상 짧지 않은 글인데 정독하시고 즐겨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분들
아주 많이 계셔서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글 이 부분 읽고 계신 이름모를 블로거 당신께도 감사합니다.
가끔 한 번쯤 해명하고 싶을 때가 있어서 길게 써 봤습니다 ;)

여행유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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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유전자 | 2009/05/11 21:10 | 태국에서 도를 닦다 | 트랙백 | 덧글(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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