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04일
여행길의 악질 잡범, 빈대에게 물린 그 뒷 이야기.

여행 중에 다리가 부러진 적도, 귓병에 걸린 적도, 옷 속까지 파고드는 메뚜기 떼를 만나 여행을 포기해 본 적도 있다. 나의 다리를 부러뜨린 불규칙 돌계단이나 인도의 메뚜기떼들을 여행길의 강력범이라고 한 번 비유해 볼까나. 그렇다면 생각보다 더 자주, 교묘하게 나의 여행길을 망쳐 놓는 악질 잡범의 타이틀은 단연 빈대에게 돌아간다. 잠든 여행자의 더운 피를 빨아 먹고 또 빨아 먹고 조금 움직였다 또 빨아 먹는 그 악질 잡범에게 나는 얼마전 9월의 여행에서도 피를 털렸다. 이 글은 지난번에 올렸던 빈대 물린 여행(클릭하면 원글 창이 열립니다)의 뒷 이야기다.

숙소 침대에 누웠는데 무엇인가 본능적으로 불쾌한 것이 있을 거라는 직감이 온 몸을 뚫고 지나갔다. '동물'로서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적 감각이 서기 2009년의 나에게도 짐승처럼 살아있었다. 그 날, 난 처음엔 그것이 모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모기를 한 마리 잡기도 했다. 나의 베갯잇엔 빨간 핏자국이 남았다. 그러나 모기의 죽음 이후에도 난 밤새 스물스물 온 몸의 불쾌감과 가려움에 잠을 못 이루고 아침까지 뒤척이다 일어나야 했다. 하얀 침대 시트 가장자리에 까맣고 작은 벌레가 있었다. 급한 마음에 시트 끝을 잡고 눌렀더니 작은 핏자국이 생겼다.
빈대가 옮겨붙었을만한 옷을 반은 버리고 반은 밀봉하고 나니 혹여 공적인 일로 사람을 만나야 할 일이 생기면 입으려고 가져온 검은 원피스만 남았다. 빈대 덕분에 뜻하지 않게 드레시한 옷차림을 하게 됐군 그래. 나는 숙소 체크 아웃을 했다. 담당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화를 낸다는 생각은 없었고(상습적인 곳이 아니라면 이 전의 손님이 벌레를 옮겨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부는 해야할 것 같았다. 나야 이미 물리고 뜯겼지만 내 다음으로 그 방을 쓰게 될 누군가를 위해, 그리고 혹시 내가 옮겨온 것으로 나중에라도 오해받고 싶지 않아서 꼭 말을 하고 가야할 것 같았다. 빈대는 시트를 간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매트리스, 침대틀 소독도 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어젯밤은 악몽이었습니다.
담당자는 내 말에, 악몽이라니요, 라고 물으며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밤새 가려워서 끔찍하고 엉망진창인 밤을 보냈습니다. 아침에 침대를 보니 작고 검은 벌레가 있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벌레였습니다. 그 방은 꼭 소독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군요.
담당자는 내 방 번호를 묻고는 자기가 나와 함께 그 방을 보아도 되겠냐고 했다. 나는 그와 지난 밤의 현장을 다시 찾았다. 피가 많이 묻은 것은 모기, 가늘고 길게 묻은 것은 그 벌레라고 설명했다. 그는 다시 로비로(사실 로비가 있다고 할 만한 호텔은 아니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신들이 내게 숙박비 환불을 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리고 숙박비를 환불해주었다. 사실 나는 환불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정당한 돈을 내고 잠도 자지 못하고 벌레에게 피만 뜯겼으므로 내가 돌려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자신의 호텔에 이런 일은 처음이며 하필 그런 불쾌한 경험을 내가 이 곳에서 겪게 되어 미안하다며 다음에 다시 이 도시를 오게된다면 그 때 꼭 다른 호텔이 아닌 이 호텔에 다시 묵어달라고. 나쁜 기억이 아니라 좋은 기억으로 자기 호텔을 기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이름있는 별 몇 개 호텔이라 그렇게 점잖게 대응한 거라면 그러려니 했겠다. 그러나 '호텔'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지점이 데스크에 평상복 직원 단 한 명이 자리를 지키는 그런 숙소다. 일행이 2명 이상이라면 같은 방조건의 호스텔과 가격이 다를 바 없는 그런 곳이다. 그러나 매뉴얼의 대사가 워낙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 날 담당자가 훌륭했던 것인지, 아무튼 손님의 의견에 귀기울여 대응한 점이 지난 밤의 악몽을 일부 잊게 해 주었다.
어떤 민박집에서는 동네를 돌아다니다 들어오는 고양이 탓을 하기도 하고, 어떤 집은 '이상하다~ 전에는 없었는데.'를 너무 강조하면서 되려 나를 의심하는 듯 말해 억울병을 만들어 주기도 했었다. 어떤 호스텔에서는 데스크의 여자의 잘못된 요구를 정정하느라 가타부타 따져서 승소했는데 막상 자다가 벌레 침공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 땐 '이 여자가 일부러 시트에 벌레를 풀었나?'라는 상상의 나래를 혼자 펼쳐보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자주있다 보니 이렇게 상식적인 대응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마음이 부드럽게 녹고 말았으니 아마도 다시 그 저렴한 저가 호텔 체인점을 예약하게 될 듯 싶다.
그리고 앞으로도 벌레나 호텔에 관련된 일이 아니더라도 정정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나는 철저한 학습효과의 제자가 될 것 같다. 분명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가져온 옷 중에서 가장 드레시한 옷을 입고 조용한 억양으로 지나가는 말로 당부를 할 것 같다. 물론 아아아주 가끔 상식 이하로 대응하는 사람에게는 정신을 잃되 고함은 치지 않는 선에서 (그러나 고함을 치기도 한다 ㅠ ㅠ) 아시아인의 무서운 외꺼풀 눈으로 끈질기게 집요하게 따지는 내 본연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

# by | 2009/11/04 09:37 | 유럽, 프랑스의 시골아닌 시골 | 트랙백 | 덧글(3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빈대에게 물리는 느낌은 어떤 걸까 상상이 잘 안 되어요.
하지만 밤새 잠을 못 이루실 정도라면-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여행 일정이 피곤하고 불쾌하겠어요. 으으..
그래도 굉장히 상냥한 대응이 위로가 되셨겠구나 싶어요 :)
보통은 불쾌하게 물리고 그 숙소를 원망하며 도망쳐나오는데
상냥한 대응으로 원망이 대폭 감소한 경우였습니다 :)
그나저나 좋은 호텔이네요.다시가고 싶어지게 하는.
빈대, 벼룩, 이의 차이를 모르겠어요.
한국어에 서툰 티파니에게 다른 멤버들이 '벼룩'은 '밀리터리 룩'같은 패션의 일종이라고 속였다는 얘기가 떠오르네요.
불교일화에서 이런 기생충에 대한 얘기가 많죠.
부처가 전생에 바느질을 하다 옷 속에 숨은 이를 죽여서 그 업보로 성불한 후에도 등창으로 고생하셨다는 이야기,
어느 정승이 자기 아내가 갑자기 가출을 해서 소금장수와 살고있어서 왜 그랬을까 궁금해서 수도를 했더니,
과거 자신이 수도승일 때 몸에 붙은 빈대를 죽이지 않고 참았다가 지나가는 멧돼지 등에 옮겨주었으며,
아내는 그 때의 빈대였고 멧돼지는 소금장수였다는 걸 깨달았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벌레와 쥐는 생각만해도 오싹해집니다.
빈대 및 그의 친구들엔 야생의 강아지들에게 붙어서 피 빨아먹고 사는 진드기 (집 먼지 진드기와 다른)도 빼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불교 일화가 재미있네요 프랑스와 독일, 스페인, 인도에서 만났던 그 빈대(및 그의 친구들)는 누구였을까요? ^^ 참, 그리고 독일에서 빈대(및 그의 친구들)를 만났다니 놀라우시겠지만 다른 여행때 다른 도시 다른 숙소에서 두 번이나 만났습니다ㅠ ㅠ
드골공항 의자 너무 마음에 드네요.
준비해간 것과는 달리 참 많은 문제점들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빈대, 벼룩... ioi 저는 그래두. 한국나가면 모기에게 덜 당하는 편이라;;;국내에서는 엄청 당해서요;
여행유전자님의 글은 정말 떠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들게 한답니다. 기내식 사진이라니; (털썩)
제가 한번 물렸다가 고생한 생각을 하면..T.T
밤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팔을 긁다가 일어나 보니..
팔이 긁은걸로 부어서 어디가 물린덴지 확인도 힘들더군요..T>T
그 후로 나왔다는 소문만 들어도 그 게스트 하우슨 안 갔습니다.
뭐..그래도...지하층에서 파는 빵은 맛 있었지만...
그런데..저 의자..항상 붐벼서 저는 못 누워봤습니다만...
(예전에 항상 그랬던 것으로 보아 그 편은 출발 시간 받아놓는 것과 실제 출발 시간을 무슨 사정상 아예 다르게 마음 먹고 해 놓았던 것 같습니다. 인천발 괌행 항공편이 항상 공식적으로 적어 놓는 도착 예정 시간보다 항상 먼저 도착하는 것도 너무 일정하니 말이죠.)
저 의자는 저도 그 전에는 누워보지 못했는데 아마 시간대가 달라서였는지 이번엔 누워서 잠깐 졸다가 일어났답니다 :)
비행기 창문 옆으로 조각상처럼 피어오르는 구름,
러시아의 끝없는 침엽수림의 장관,
붉은 지붕의 나라,
구불구불 용의 등허리같은 인도차이나의 메콩강,
진공상태처럼 고요한 푸른 하늘...
모두 가슴을 뛰게하는 것들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빈대란 놈을 구경도 못해봤답니다...
비행기에서의 두번째 사진 참 인상적이네요.....
빈대는 벽에 죽은 시체만 보았는데 아주 작은 납작한 복주머니처럼 생긴 벌레입니다.
ㅠ ㅠ
두번째 사진은 정말 퀼트가 떠오르지요... :)
저 밭 한 가운데 사람들이 모여사는 잿빛 마을도 재미있고요...
흐아~ 완전 끔찍해요~
빈대를 겪을 때의 느낌은 아주 찐득찐득한 불쾌감이어서 항상 더 힘들었습니다
동감해주시는 바람처럼 님 고맙습니다 :)
보스톤에서 세네갈로 엄청나게 뛰어넘는 그 느낌 말이죠 :)
체크인시간 아슬아슬하게 가서 체크인하려는데 유학생 짐이 좀 많아야죠 ㅠㅠ
트렁크열고 짐빼고,줄이고,뛰고...헥헥
그래도 무슨 러브스토리 찍는마냥 힘들게 체크인하고 에스컬레이터타고 올라가는데
제 뒤로 지는해가 비치고 오빠랑 저는 울면서 헤어지고 ㅠㅠ
아이고 드골공항,하면 참 감회가..-_;;;
헛, 드골공항 처음 도착했을 땐 흐리고 바람불고 우중충했는데
그때도 지금의 남자친구가 마중나왔었네요. 학교의 선배신분으로..ㅎㅎㅎㅎ
저도 사실 돌아오는 길에 짐 무게 초과로
가벼워 보이는 듯 가장 무거운 것들만 골라 가뿐한 듯 들고 비행기까지 오르느라...
ㅠ ㅠ
....
그런데 그런데
반전이 있네요, 도착할 때의 그 선배분이 지금의 남친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