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코임브라] 써포터 형님들과 한밤의 만찬을 ② / 코임브라發 유레일


우연히 그렇게 먹자판 밤기차 포르투갈 형님들의 밤만찬에 합세하자 이 기차칸은 다른 옆 칸 사람들이 자든지 불면증에 걸리든지 민사 소송을 하든지 말든지 한밤의 카니발 먹자 + 마시자 + 목청껏 떠들자 + 노래하자 + 웃자 기차칸이 됐다.
  
"형님들은 어디에서 오셨어요? 어디로 가시는 거죠?"

"우리? 우리는 벤피카! 벤피카 몰라? 벤피카? 우리는 벤피카 써포터들이야-!"

팔뚝 털 숭숭 형님, 벤피카 심벌이 그려진 종이컵을 들여 보이신다. 이 와중에도 말없이 꾸준하게 치즈와 샐러드를 드시고 계신 포와로(를 연상시킨다) 형님만 제외하고 모두가 '벤피카'란 팀 이름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가득한 얼굴들이다.

솔직히 내가 벤피카를 어찌 안단 말인가! 축구를 싫어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유럽 리그의 포르투갈팀 이름까지 알 정도는 아닌 그저 평범한 여행자에 불과한 내가! 그러나 흥에 겨운 눈빛으로 내 입에서 "아 그럼요, 벤피카가 최고죠!"란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나를 바라보는 형님들 앞에서 모른다 할 수가 없었던 나는 대충

"아~ 그렇구나~ 벤피카~~~ '그' 축구팀 벤피카 맞? ~ 그렇죠! 벤피카~ 축구~"

하고 유야무야 넘겼다. 대충 눈치를 보고 나중에 알고도 보니 벤피카는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보아를 연고로 한 프로 축구팀으로 유럽의 리그에서 경기를 하고 있는 팀이었다.

이어서 형님들의 벤피카 아이템 홍보 활동이 이어졌다.

한 형님의 머플러를 보고 감탄을 하면 다른 형님이 막 나를 부른다, "아~ 여기도 있어 여기도!"
그래서 그 분을 보고 있는데도 고개 돌아가 나를 향해 다른 분께서는 여전히 열심히 유니폼 설명까지...
"요거 요거 요거는 벤피카건데, 이 녀석 입은건 벤피카 아니야! 맨유 유니폼이야!"
그러면 이 사태 바라보고만 있던 영어 못하는 다른 형님은 다른 형님한테
"야, 그거 옷 말고, 그거 보여줘, 그거, 스포츠 신문! 그거 꺼내서 (hertravel한테) 보여줘!"
뭐 이런 류의 포르투갈어가 마구 오간다.


'호떡집에 불난다는 표현'도 있지만 
'벤피카 형님들이 밤기차 탔다'라는 표현도 상용화시켜야 한다...
 

자, 그리고 형님들의 'hertravel 먹이기'가 이어졌다. 치즈와 샐러드를 그렇게 열심히 드시던 유사 포와로 형님께서는 그 피같은 마지막 조각을 나에게 먹이셨다. "먹어욧, 먹어! 이거, 맛있다구! 이거, 포르투갈!"  
 
"드셔!"

이번엔 술이다.

"포르투갈 와인! 비노 띤또! 이거 최고!"

아까 침대칸에서 이미 작은 와인 한 병을 마신 상태였지만
주시는 술을 마다해서 형님들을 배신하랴,
나는 또 마셨다.

하지만 그 한잔은 대하소설 <토지>의 1권 1쪽을
이제 겨우 막 펼쳐든 것과 같았다.

계속 한 잔...한 잔...나중엔 남의 잔치에 너무 오래 와 있는 것 같아서 공식적으로 인사를 마치고 자리를 떴음에도 다시 화장실 가는 길목에서 딱 붙들려 또 한 잔... 이건 포르투갈 와인이니까 꼭 마셔봐야 되는 거고...이건 포르투갈 독주니까 너는 꼭 마셔봐야 하고...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급기야 아저씨들의 안주머니에서 금주시대 배경 미국 영화에서 알콜중독 판사님이 재판전에 몰래 꺼내 마시던 손바닥만한 휴대용 술병(?)이 나오고 조니워커도 지팡이를 들고 여기 저기 걸어다니신다. 술이 들어가며 이야기는 점점 길어졌다.

알고보니 형님들은 스코틀랜드 셀틱과의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나신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스코틀랜드 셀틱에서 맹활약중인 나카무라 슌스케의 기사를 펼쳐 보이며 열광적인 내 반응을 잔뜩 기대하는 것이었다. 아, 나는 그 때 알았다! 그랬다! 우리 포르투갈 형님들께서는 내가 일본인인줄로 아셨던 거다! 그들이 경기를 보러갈 바로 상대팀의 나카무라 선수 동향인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아, 형님! 그런데 저는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입니다! 서울! 코리아!"

"코리아?"

"네 형님! 코리아요! 월드컵!"

"...후스 히딩크?"

"네! 아 맞다! 그러고보니 우리나라, 포르투갈이랑 게임도 했잖아요! 거기서 박지성이...................!........"

나는 신나게 슛을 하는 폼을 잡다가 말 그대로 순간 얼어 붙어 버렸다. 슛을 하다만 폼으로 얼어붙은 나는 순간적으로 우리 포르투갈 훌리건 형님과 눈이 마주쳤다. 형님도 순간 얼어붙어 있었다. 만화에서 혹은 영화에서 순간 시간이 정지한 샷, 카메라가 정지한 우리를 360도로 빙빙 돌며 찍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적.....막....



그래! 우리나라가 포르투갈이랑 경기를 했었지!


그 유명한 박지성 선수 히딩크 감독 부자상봉씬을 낳은 바로 그 경기...!


끝나고 나서 포르투갈 선수, 아 맞다, 피구가 울지 않았던가?

"아... 그러니까...

...

...

술 드셔!"


갑자기 미안해하며 얼어붙은 나의 모습 자체가 형님들께는 슬픈 기억 그 자체였다. 형님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듯한 모습을 보이며 괜찮아 괜찮아~ 하며 곧 다음 단계로 넘어 가셨다.


이제 내가 술을 사양할 수 있는 이유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윽고 형님들, 입을 떼신다...


"우리, 포르투갈, ... 멜론 맛 좋아... 먹어봐, 좋아..."


아아 역시 멋진 우리 포르투갈 형님들! 처음엔 '혹시... 이런 분들이 바로 훌리건 형님들...?'하고 생각했지만 보면 볼수록 좋은 이 분들! 이 분들은 불의한 심판 판정에도 운동장 난입보다는 속으로 분을 삭히시며 가방에서 멜론을 꺼내 깎아 드실게야...  


새벽이 되자 형님들은 프랑스 국경 갈아타는 역에서 다같이 내리셨다. 이 역에서 형님들과 나는 굿바이를 했다. 준비해 온 새끼 돼지 구이부터 시작한 갖가지 안주와 갖가지 종류의 술, 즐거운 마음, 축구복 복장 코드...

형님들은 너무나 멋진 밤기차의 꾼들이었다. 이 즐거운 추억을 되씹으며 나는 빙그레 웃었다. 이제 갈아탄 프랑스 국경으로 넘어가는 새롭고 편한 1등석 기차칸의 편안함 때문이 아니라 지난밤 초라한 밤기차칸의 요란한 추억으로 말이다.

by hertravel | 2007/10/10 02:53 | 유럽 땅끝 이베리아 버스여행 | 트랙백 | 덧글(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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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까날 at 2007/10/10 03:03
적막 직후에 알리는 말씀이 절묘한 타이밍으로 흐르는군요.......
Commented by lie4me at 2007/10/10 03:41
사이에 적막, 읽고 있는 저조차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무튼, 이해심 있는 좋은 분들이어서 다행이에요.
저는 순간 무섭게 돌변하는 분위기와 더불어 hertravel님이 큰일 당하시는 상상을...(쿨럭-)
(포스팅 속 아저씨들께 순간이라도 오해해서 죄송스럽네요'ㅅ';)

정말 너무나 멋진 밤기차의 '꾼'들이세요.
hertravel님도 그 속에 잘 녹아드신 것 같고요.

그나저나 술 정말 많이 드셨겠어요~ㅎㅎ
Commented at 2007/10/10 05:5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JyuRing at 2007/10/10 07:20
재밌네요..^^ 이해심 있고 재밌으신 분들이라 다행이네요.
아저씨들은 역시 시끌벅적..^^
Commented by 태니 at 2007/10/10 08:19
출근하기 싫은 날 출근해서 투덜투덜대다가 이 글 읽고 기분이 너무 좋아졌습니다.
ㅠ_ㅠ 내년엔 또 어딜가나~
제 계획은 올해 샌프란시스코 다녀오는거였고요(다녀왔고요;;;)
내년엔 스페인이였다가->북유럽->이태리로 자꾸 바뀌네요. 이태리가 대대적인 공사중이라고
주변에선 '원래 가기로했던데 가! 멀 자꾸 바꿔!'라는 반응;;;
Commented by 식용달팽이 at 2007/10/10 08:21
반전이 살짝 무서웠어요......^^;
hertravel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오오오! 기다리고 있었어요~^^*
Commented by 리앤 at 2007/10/10 09:22
하하하하 너무 유쾌하신 분들이군요
덩달아 저의 기분도 up!!
Commented by 시엔 at 2007/10/10 10:12
적막.... 이게 흐르는 부분에서 저... 저 회사인데...
너무 크게 웃음 터트릴뻔 봤네요
두리번두리번
그래도 앞여행기랑 이어서 유쾌통쾌상쾌하군요
즐거워요~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10/10 12:52
까날님/ 아픈 경험때문에... ^^

lie4me님/ 정말 멋지고 좋은 분들이라 순간 허걱하다가 형님이 '괜찮다' 윤허를 내려 주셔서 ^^

비공개크크크님/ 그리고 포르투갈 정말 아저씨들 별로 영어 안 통하는 나라인데 상당히 하이하신 형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 돼지고기 수술하신 분은 정말 의사가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

JyuRing님/ 정말 경기 중인 운동장에 이미 와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

태니님/ 스페인, 북유럽, 이탈리아 다 좋지요^^ 북유럽은 겨울을 피하시고 (낮 2시면 해가 진다는...) 이탈리아는 한여름을 피하시고 (기상이변 폭염에 갔다면 나무 그늘만 구경하다 오실 수도...) 스페인은 동네 축제가 (너무 큰 축제는 숙소가 비싸지니...) 있을 때 다녀오시면 좋겠습니다...

식용달팽이님/ 격렬한 환영, 감사합니다아아아아아...:)

리앤님/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주신 형님들께 저도 감사를~!

시엔님/ 그렇습니다 역시 앞 여행기와 이어서 감상해 주시면 더 좋습니다 :) 그나저나 웃음을 터뜨리셨다면 4차원 세계의 직원이 되셨을뻔 봤을텐데요 아깝습니다.
Commented by 소마 at 2007/10/10 13:03
아;; 정말 다행입니다! 마음도 넓으신 형님들이군요! 왠지 저쪽 나라에 가면 꼭 축구경기를 관람해서 응원하는걸 봐야 할꺼 같은 기분입니다. 경기장을 가득 울리는 형님들의 함성이...! 멋진 경험하셨군요^^
Commented by 태니 at 2007/10/10 13:25
직딩이라서...-_-여름휴가때 가야지요...흑. 이태리는 못가겠네요. 스페인도 덥겠죠;;;
Commented by Rancelot at 2007/10/10 19:25
정말 호쾌 유쾌하신 분들이군요. 이것이야 말로 대인배!
Commented by 마이아 at 2007/10/10 20:25
hertravel님!!! 돌아오셨어요!!!!!
매일 밸리를 빙글빙글 돌며 hertravel님의 여행기가 올라오기만 기다렸답니다ㅠㅠ

그나저나, 그 떠들썩한 분위기가 글 속에서도 고스란히 다 느껴지는 듯 하네요~
아.. 정말 재밌으셨겠다.. 쩝..ㅋ
Commented by renton at 2007/10/11 02:16
와 오랜만의 컴백이세요! 그동안 기다렸었는데 ^^
역시 술 하나면 뭉칠 수 있는 우리는 지구인!
Commented by 징소리 at 2007/10/16 17:25
뭐랄까... 어딘가에 빠져서 완전 열광할 수 있다는게 부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럽니다. 저런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도 푹 빠져 열광할 수 있겠죠?

(전 연예인이나, 축구나, 야구나 어딘가에 빠지는게 안되더라구요)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10/19 01:02
소마님! / 저도 형님들 따라서 축구장에 같이 가면 무척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뭔가 저질르고 싶은 그런 분위기가 있더라고요!

태니님! / 어디든 좋지 않겠습니까!

Rancelot님! / 대인배의 포스는 넓고도 넓지요!

마이아님! / 반갑게 맞아주시니 저도 너무나 반갑습니다!

renton님! / 역시 술 하나면...! 저 날 그 큰 힘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징소리님! / 어딘가에 빠지면 그 작은 것으로도 행복하잖아요. 징소리님도 지금 블로그에 빠지시지 않으셨나요? :)
Commented by puella at 2008/12/31 00:30
으악!글 클릭하고 깜짝 놀라고 갑니다. 낯선곳에서 동지를 만나다니...여행유전자님이 동지란 얘기가 아니라, 저 형님들이요!실은 저도 Benfiquista.
Commented by 여행유전자 at 2008/12/31 01:14
아! 그러시군요 ^^
실은 저 땐 제가 벤피카를 잘 몰랐는데 그 이후로 포르투갈 중부 이하라면 어디에서라도 벤피카를 외치면 한순간에 듬뿍 사랑을 받게 되더군요 :) 돌아다니다보니 FC 포르투와 벤피카 써포터님들의 열정에 확 녹을 것만 같았습니다 :)
Commented by 희정이 at 2009/01/03 13:02
정말 재밌는 서포터스들과 보낸 불타다- 얼은 밤이네요 벤피카와 함께라면 포루투갈의 밤도 외롭지 않을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Commented by 여행유전자 at 2009/01/05 04:28
헤헤헤 중남부 이하에서는 벤피카만 외쳐도 반은 먹고 들어갑니다 :)
Commented by 나미너미 at 2009/04/23 23:12
우하핫...살다보면 손발이오그라들고 주댕이가쏙들어가고머릿속이휑해지는 그런순간이잇지여...
내일아니고 님의일이다보니 터져나오는 웃음ㅋㅎㅎ 지송함다~~
Commented by 여행유전자 at 2009/04/28 08:45
ㅋㅋㅋ
박지성 선수만 보면 그 때 생각이 납니다
Commented by 상희스타일 at 2009/12/03 19:02
이건 다시 봐도 정말 재미있어요 ㅋㅋ 이거 드셔봐! ㅋ
Commented by 여행유전자 at 2009/12/04 01:44
후흐흐 정말 '자꾸 먹여서 손님이 숨을 못 쉬거나 취해서 정신을 잃을때까지' 접대하는 것이 우리들만의 문화는 아니더라구요 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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