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 이런 소원을 빈다 / 삿포로 APIA 태양의 광장_3

아마도 소원 적기 세계 대회를 연다면 1위는 일본 사람들이 차지할 것 같다. 일본인들은 보통 무슨 소원을 빌까? 일본인들이 소원 적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 소원을 적는 이벤트를 잘 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일본을 여행하다보면 소원을 적는 곳을 한두번은 꼭 지나치게 마련이다. 

일본 TV 프로그램(특히 공익적인 프로그램)에서도 특히 소원을 적는 것에 대한 이벤트가 많다. 아마도 알게 모르게 우리 방송에도 그 영향이 있을 것이다. 소원을 적은 무엇을 어디에 달아 놓는다든지, 소원을 적은 무엇으로 무엇인가를 만든다든지... 물론 소원을 비는 것에 일본인들이 전매 특허를 낸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대체적으로 우리네 소원은 (민속학자가 아니라 당연히 그냥 내 생각이다) 어디에 쓰기 보다는 마음으로 빌었던 것 같다. 달을 보고 빌거나 물을 떠놓고 빌거나...

그러나 이 곳은 치마저고리 입고 머리에 쪽진 어머니가 새벽에 물 떠놓는 한국이 아니라 굵은 컬 들어간 긴 섀기컷 염색 머리 휘날리는 언니들의 일본이다. 삿포로에 내리자마자 나는 많은 일본 사람들이 빌고 싶은 소원이 어떤 것들인지 볼 수 있었다.
  

삿포로 JR역 지하도를 걷다 APIA 쇼핑몰이 나타나면서 자연 채광이 들어오는 유리창 아래 대나무 몇 그루와 특이한 전시물이 보였다. APIA 쇼핑몰의 상징인 <태양의 광장>이라고 한다.
신사도 아닌데 쇼핑몰에서 무슨 소원적기 행사를...? 소원을 적으면 추첨해서 경품을 준다 뭐 그런 백화점 행사? 그런데 행사 이름을 보니 <칠석>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간간히 보이는 견우, 라는 한자와 직녀, 라는 한자...
"견우랑 직녀가 일본에도 있었어?...아니, 혹시, 원래 일본 거였던 거야?"

나는 놀라서 외쳤다. 일본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어렸을 때 읽었던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부터 한국 노래인줄로 알았는데 처음 만난 재일교포분과 같이 소리 높여 부를 수 있었던 수많은 TV 만화 주제가들, 아이들과 놀 때 편을 가르던 <데덴~찌>의 태생을 처음 알았던 그 때처럼 그렇게 나는 놀라서 외쳤다.

진정하고 설명을 읽어보니 견우와 직녀는 한국만의 이야기도 아니고 일본만의 이야기도 아니고 한중일이 같이 갖고 있는 설화였다. 그런데 견우랑 직녀가 만나 눈물 콧물 흘리며 강수량을 높인다는 그 설화하고 소원 적는 이 행사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써 있는 설명을 차근차근 읽으며 추정해 보니 한국 견우 직녀하고 일본 견우 직녀하고 버전이 좀 달랐다. 우리나라 견우와 직녀는 까마귀 까치가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라고 자원 봉사 몸바쳐 다리를 만들면 그넘들을 자근자근 밟으며 만나서 한恨의 민족답게 펑펑 울었으니, 칠월칠석이면 비가 오게 되었다~ 이건데,

일본 견우 직녀는 까마귀 까치에게 인심을 얻지 못했는지 견우가 배를 타고 직녀에게 건너가서 그 둘은 그렇게 1년에 한 번, 만나는 소원을 이룬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이런 류의 설화 들으면 답답증에 혈압이 솓구쳤다. "젠장, 왜 소원이 1년에 한 번 만나는 거냐구! 그냥 다리를 놔 달라고 소원을 빌엇! 1년 365일 다리 건너다니며 보면 되잖어! 아니! 아니! 그냥 같이 살게 해달라고 한 번 빌면 되는 거잖아! 아님 램프의 요정을 달라고 해서 소원을 세 개로 늘이란 말이닷!") 그래서 일본에서는 칠월칠석이 소원을 비는 날이 됐다는 거다. 소원도 오늘 본 것처럼 오색의 종이에 소원을 써서 대나무에 걸어 놓는 것이란다. 

일본 사람들은 어떤 소원을 빌고 있나 들여다 보았다. 소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BEST 소원의 주제는 역시 1위-건강 기원, 2위-사랑 기원, 3위-진학 기원 이었다. 하지만 곳곳에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소원들도 BEST 3위 소원들 못지않게 많았는데, 그 내용이 나를 미소짓게 했다. 
※ 한국어 소원 종이를 발견! '여행 잘 마치고 돌아가면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십니까? ^^ 소원은 이루셨는지...

아무래도 심사위원들이 한국이랑 헛갈렸어~라고 나 혼자 주장해 보는 미스 유니버스 미스 저팬 모리양께서도 이 곳에 오셨는가, 미인대회용 전용 소원인 '세계 평화'도 있었다! (... 농담이고^^ 이 소원 이벤트의 생각 반경을 확 넓혀준 장~한 소원이다)
아니, 돗토리현에서는 무슨 일이...?  당장 더우니 기온이 내려가라도 아니고 '평 균 기 온'이 떨어지기를 소원하다니, 궁금하다 궁금해. 분명 지구 온난화로 돗토리현에도 뭔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폭설뿐만 아니라... 물고기들이 오지 않는다든지... 아님 이 소원 쓴 양반의 철천지 웬수가 돗토리현에서 에어컨 장사를 하고 있다든지...

이쯤에서 언젠가 교토에 여행갔을 때 청수사(기요미즈데라)에서 소원 나무패를 보았던 것이 생각난다. 수학 여행을 온 일본 학생들의 진학 기원이 대부분을 차지 했다. "고등학교에 합격하게 해 주세구다사-이-", 그리고 외국인들이 "마이크와 러브 포에버 플리즈", 그런데 거기도 한글이 하나 눈에 띄었으니...
(여기서 감상 포인트 : 'ㅆㅂ' 이라고 썼다가 지웠다) 

처음엔 과감하게 써 내려간 글과 어지간해서는 소원패(에마)에서 볼 수 없는 ㅋ ㅋ 초성체! 호기있게 ㅆ ㅂ 이라고 썼다가 소심하게 지운 흔적 때문에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초등학생이 쓴 것 같기도 하고 워낙 당시에 독도 분쟁으로 많이 감정이 상해 있을 때라 (뭐, 아닌 날들이 별로 없지만) 웃긴다, 하고 사진 찍었는데 찍으면서도 한편 씁쓰름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남의 나라 유적지에 쓸 말은 아닌 것 같다.

소원 적기 올린 김에 서양의 소원 이벤트는 어떻게 이뤄지나, 독일 하이델베르그에서 찍은 사진을 한 장 더 올려 본다. 하이텔베르그 역에서 메인 스트리트까지 가기 전에 설치돼 있는 나무 토막 조각들. 독일어를 몰라 무엇을 위한 서명, 소원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서명과 PEACE, NO WAR와 같은 영어 단어가 보인다. 몇 년 전에 찍은 것인데도 다른 사람들 여행 기록에 간혹 이것이 보인다. 1회성이 아니라 계속 진행, 설치중인 것으로 보인다.

by hertravel | 2007/08/10 16:34 | 북해도의 별 | 트랙백 | 핑백(1) | 덧글(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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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1mokiss at 2007/08/10 17:09
옷스, 소원빌기도 소원빌기고 순위매기기도 세계에서 으뜸이 아닐까 싶어요. 가끔 만나게 되는 일본인 친구들이 늘상 '좋아하는 여배우',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여행지'의 순위 등등을 물어대는 통에 당황했었던 것이 떠올라요. 섬나라 안에서 나름대로 소박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묻어나는 것일까 생각도 해보곤 했지만, 뭐, 이유는 잘 모르겠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8/10 17:14
탁구를 잘하게(?) 해달라는 소원이나 시민 체육 대회 우승 같은 소원 참 소박하죠? 우리는 막상 소원을 적으라고 하면 그런 소원들은 갑자기 생각이 안 나는데...
Commented by hisha at 2007/08/10 17:15
저런거 있으면 일일히 다 읽는 편인데, 어떤 어린아이의 글씨로 "엄마를 만나게 해주세요" 가 써진 것을 보고 무척 슬펐습니다 -_ㅠ 반면, "의사 남친 생기게 해주세요" 같은 것도 있기는 했지요-_-;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8/10 17:20
"엄마를 만나게 해 주세요" 아 슬픕니다. 정말 소원이 이뤄졌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의사 남친" 아 절실합니다. 소원이 이뤄졌다면 한글자 실수한 겁니다.
Commented at 2007/08/10 17:2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8/10 17:28
오 그곳에서도 하는군요. 소원이...다음 대회에서 이뤄지지 않을까요...? ^^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8/10 17:37
우왕...방금 전에 메이지 신궁 팁을 지웠습니다. 쓰고 보니 <북해도 여행 팁>은 아닌 것 같아서요. 하지만 새벽사랑님 덧글과 지금 제덧덧글을 읽는 분들은 어떤 말인지 아시겠죠...참고로 다른 분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특별히 '신궁'은 일본 천황을 기리는 곳이라는, 하필이면 굳이 메이지 천황의 영혼에게 소원을 빌다니...최소한 신궁만은 피해달라는 그런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격려글 정말 감사합니다 ^^ 빨리 올리도록 더 노력하려고 합니다 :) 유럽이랑 도쿄 다 까먹을까봐 후다닥 쓰려고요~
Commented by 새벽사랑 at 2007/08/10 17:37
저도 메이지 신궁에서 수많은 한글 에마를 보고 잠시 멍했습니다....정말 이건 아닌데, 말이죠..
hertravel님의 잼난 글, 항상 목말라하며 기다리는 거 아시죠? ^^*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8/10 17:38
헉...이런 숨바꼭질이... 위의 새벽사랑님 덧글과 제 덧덧글은 순서를 거꾸로 읽으시면 됩니다 :)
Commented by marlowe at 2007/08/10 17:47
이어령 선생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떠오르네요. 소원을 비는 것은 어느 나라 사람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유독 일본인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꼭 들어오는 형태로 구체화시켜야 만족하는 것 같습니다. 일본에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많고, 여행 기념품이 오래 전부터 발달한 것도 '자신의 여행체험을 만질 수 있는 형태로 전환해서 공유한다'는 일본인들의 심성 때문에 그런가 봐요.
Commented by 시엔 at 2007/08/10 18:56
네모 안에 맞는 말은 탁구를 <잘하게 되도록>입니다 ㅎㅎㅎ
하여간 이 나라 사람들은 미신도 많고, 신사도 많고, 신도 많고
소원도 많은 것 같아요 ㅎㅎ
Commented by 플라멩코핑크 at 2007/08/10 19:42
소원없이 사는게 소원이라죠.
앗. 그렇게 된다면 너무 재미없겠죠? ^_^
Commented at 2007/08/10 20:5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8/10 23:43
marlowe님/ 역시 천재 이어령 선생님이십니다. 정말 우리는 소원이 뭐냐고 물으면 '그냥... 좋게... 뭐...건강하고...그냥 잘...' 이 정도로 두루뭉실하지만 일본 사람들의 소원은 소박한 일까지 구체적으로 아기자기하게 써 놓았더군요.

시엔님/ 역시 네모칸을 채워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 일본은 정말 미신이 그냥 터부가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그런 게 있더군요...

플라멩코핑크님/ 저의 소원은 아주 많습니다^^ 소원 없이 살 수가 없어요 ^^ 일단 제가 생각하는 일이 잘 됐으면 좋겠고, 제 일생에 전쟁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고, 건강했으면 좋겠고... :)......


비공개님/ 으하하하 이런 사오정같은 일이...^^ 고쳤습니다~!
Commented by 식용달팽이 at 2007/08/10 23:56
세계 평화와 체육 대회 우승 기원은 글씨부터 호쾌하네요! 덩치 큰 아저씨가 저 소원의 주인일 것 같아요. 다 쓰고선 자기 글씨에 만족해서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걸어놨을 것 같아요.^^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8/11 00:23
저도 체육 대회 우승은 50대 넉살 좋은 아저씨가 적어놓았을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유머가 있는 소박한 작은 일본 영화 속 이야기 같죠? :)
Commented by lie4me at 2007/08/11 00:41
세계 평화 보고 막- 웃었어요.
모양이나 형태는 조금씩 달라도 소원을 비는 건 만국공통인가봅니다.
일본가면 에마에 소원적는거 해 보고 싶었는데'ㅅ'
만화책에서만 보다가; 진짜 에마 보니까 느낌이 새롭네요.ㅎ


Commented by Charlie at 2007/08/11 01:57
예전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신이된 브루스가 사람들의 소원을 이메일로 받아보는 장면이 있었지요..; 저래서 메일함이 폭주하는거군요. :)
Commented at 2007/08/11 09:4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8/11 09:53
lie4me님/ lie4me님의 소원은 '일본가서 에마에 소원 적는 것'? :)

Charlie님/ 소원폭주! :)

비공개님/ 감사합니다~ 익숙해지기까지 했답니다 ^^
Commented by 다크루리 at 2007/08/14 11:21
교토 절들은 정말 소원 비는 곳이 한 두군데가 아니더군요. 그나저나 한국어로 "~~씨, ~~랑 빨랑 헤어져. 3일준다." 라는 명패가 있어서 최고였습니다. A.RA.SHI랑 동방신기 예찬은 어디서나 있는 것같고.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8/14 15:23
소원이 아니라 저주를...!
그러고보니 저 소원 쪽지에도 누군더라...암튼 일본 연예인 누구에 대한 기원이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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