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암스텔담] 오후의 맥주 한 잔에 세상이 다 보이다 / weteringschans


맛있는 맥주의 조건. 적당히 차가운 온도로 서빙되는 그 청량감. 많지도 적지도 않은 풍성한 거품이 윗입술에 닿을 때의 첫 느낌. 쌉쌀하고 고소한 맛. 들큰하지 않고 깔끔한 뒷맛. 손에 기분좋게 쥐어지는 맥주잔의 느낌. 

그리고 이 날 오후 마신 한 잔의 맥주는 맛있는 맥주의 특별한 세가지 조건을 더 가졌으니 첫 번째는 그 맥주의 고향 현지에서 마신다는 특별함이다. 암스텔강이 흐르는 암스텔담을 걷다 마시는, 이름까지 암스텔인 한잔의 암스텔 맥주 Amstel Bier.
맥주가 맛있는 특별한 두번째 조건은 '낯설고 그저 그렇긴 하지만 나만의 그 곳 그 순간을 추억해주는 정취'다. 여행지에서 유명하다는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걷기를 멈추고 모르는 동네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모르는 바에서 다리를 쉬면서 마실 때의 정취가 그것이다.

'유명한 관광 거리의 유명한 바'가 아니라 여행자들이 굳이 이 곳을 찾아 들를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는 동네의 바bar. 그 곳까지 흘러 들어온 나같은 여행자가 하루 종일 걸어다닌 다리를 잠시 쉬어 가고 싶은 오후의 카페. 특별히 외양이 예쁜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인테리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물 좋은 손님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목 좋은 길목에 있는 것도 아닌 그저 그런 평범한 카페.

지도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여행을 다닐때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방향에 맞춰 내멋대로 정한다. 당연하게도 여행자들의 코스와는 상관없는 아주 평범한 골목을 슬렁슬렁 걷다가 이런 평범한 카페에서 다리를 쉬고, 그 때까지의 짧은 여행 단상을 적으며 맥주를 마신다. 그리고 나는 이 작은 자유로움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 카페의 붉은 차양엔 암스텔비어 Amstel Bier라 맥주의 이름이 써 있고 동그란 암스텔 맥주 불빛이 차양 끝에 달려 있다.

네덜란드의 암스텔담. 이 도시의 이름은 도시를 가로 지르는 암스텔江에서 왔다. 그리고 이 도시의 맥주인 암스텔 맥주의 이름도 같은 곳에서 왔다. 암스텔 맥주는 맛이 좋았고 특히 빛깔이 먹음직스러웠다. 사진에도 보이는 저 잘난 빛깔이 맥주가 맛있는 세번째 특별한 조건이 되시겠다...
이 가게 바깥쪽에 앉아 나는 주섬주섬 수첩을 꺼내 짧은 여행기를 쓴다. 인천 공항에서 여행자 보험을 들 때 달아준 작은 볼펜을 손에 든다. 

"관광지 술집이 아니라서 영어 메뉴도 없고 대신 비싸지도 않아. 암스텔 맥주 한 잔이 2유로. 서빙하는 남자는 친절하고 나는 이런 평범한 동네 술집이 좋다. 영어 메뉴가 없는 이런 술집!!!" 이라고 먼저 한마디를 썼다.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미국 애들이 너무너무 반가와하며 완전 유창 영어로 말을 걸어와서 속으로 내심 놀라 땀 찔찔 흘리면서 대꾸하느라 고생했는데 중간에 그 이유를 알았다. 유럽 여행하다가 버리려고 입고 온 오늘 티셔츠가 하필이면 기념품용 '버클리大'  학교 로고 티셔츠였다는...어쩐지 영어 너무 심하게 영어하게 말 하더니...! 아무튼 학력 위조 사기 티셔츠덕분에 하루 종일 친절을 받다보니 미국인에다 학벌까지 좋으면 여행도 편하겠구나 싶다"라고 쓴다.

아까 하이네켄에서 만난 녀석들 이름을 적으려고 하는데 한 명 이름은 까먹었고 알베르토밖에 생각이 안 나네. 이런 조기성 -혹은 알콜성일지도- 치매가 있나... 나는 볼펜을 수첩 위에 내려 놓고 테이블 위의 암스텔 맥주를 한 모금 시원하게 마신다. 우리 카페의 테이블 앞 길로 암스텔담의 사람들이 오고 간다. 나는 잠시 그 구경에 빠진다. 명산 꼭대기에 앉은 도인이 바위 위에 앉아서도 세상을 다 내려다 보듯 '동네 술집 의자에 앉아서도 암스텔담이 다 보인다'고 주장하며 말이다.
레몬을 꽂은 콜라 한 잔을 마시는 주인의 수다가 끝나도록 내내 그 발치에 멍멍이는 충성스럽게도 엎드려 있다. 이 도시 특유의 작은 자동차들이 거리를 달린다. 자동차보다 더 많은 자전거가 지나간다. 오르막 내리막길이 없는 암스텔담에서 자전거는 괜찮은 대중 교통 수단일 것 같다. 암스텔담 사람들은 차도에서도 양 손을 놓고 수다를 떨면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재주가 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우연인가 아닌가? 건너편 아파트 창문의 커튼이 오렌지색이다. 밝고 강렬한 오렌지색. 색은 예쁘지만 커튼으로 흔하게 쓸만한 색은 아닌데... 

그러고보니 이 도시에 정말 오렌지색이 많았다. 이 카페에 오기 전에 길에서 보았던 민속 음악 가게 앞 삼바 공연 사람들의 옷도 오렌지 계열이었고 그 옆 자전거 가게 앞 진열된 자전거들도 오렌지색이었다.
갑자기 히딩크 감독의 네덜란드 국가대표 오렌지 군단이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우리나라 선수들을 대상으로 오대빵으로 뻥뻥 골을 넣었던 프랑스 월드컵의 그 무서운 관중석의 오렌지 물결이 떠올랐다.

(사진은 독일 월드컵 때의 오렌지 군단)

당시만해도 세계적 경기에 새가슴이었던 우리나라 선수들이 경기장에 들어서자마자 안그래도 새가슴 완전히 쫄아버리게 만들었던 그 오렌지색! 훗날 한일 월드컵때의 붉은 악마에 버금가는 오렌지색 도배 관중석의 그 충격! 

네덜란드 건국의 아버지 오란예(오렌지)公 에서 비롯됐다는 네덜란드 대표 색깔 오렌지색. 네덜란드 사회는 정말 실제로 이렇게 생활 속에서도 오렌지색을 사랑하는 걸까? 오후의 암스텔 맥주 한 잔을 비우면서 암스텔담 구경은 한동안 계속됐다.


 여행유전자 따라 지구 한 바퀴
[유럽에 취醉하다] 카테고리는
골목 선술집에서 여행에 취하고 사람에 취한
유럽 중부 맥주 여행과 남부 와인 여행 코스의 여행기입니다.
[유럽의 골목을 샅샅이] 다닌 카테고리를 통합해서 쓰고 있습니다.

by hertravel | 2007/07/30 16:26 | 유럽에 취醉하다 | 트랙백 | 핑백(1) | 덧글(23)

트랙백 주소 : http://hertravel.egloos.com/tb/364562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Linked at 여행유전자 따라 지구 한 바퀴.. at 2009/03/30 16:54

... p;다다미가 부러운 유럽인들_42 스트라스부르 숙소 전쟁_41 -암스텔담_네덜란드암스텔 맥주와 암스텔 강,고흐는 고향이 그리워오후의 맥주 한 잔에 세상이 다 보이다알베르토와 나, 단 하나가 같다는 이유로어른들의 디즈니랜드, 하이네켄 공장 투어유쾌한 여행자를 제조하는 비밀 레서피 당신은 불고기, 나는 하이네켄& ... more

Commented by marlowe at 2007/07/30 16:28
오렌지하면, 베트남전에 미군이 사용한 오렌지 에이전트가 먼저 떠오릅니다.
주말에 [키사라즈 캣츠아이: 일본 시리즈]를 보았는 데, 맥주를 정말 맛있게 먹더라구요.
Commented at 2007/07/30 16:3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7/30 16:33
오렌지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것은 여러가지가 되겠군요. 고엽제는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맞습니다 역시 세계에서 맥주를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뽑자면 역시 일본 사람들이 빠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 식전에 꼭 맥주를 한 잔하는 모습을 보면 남녀노소가 없는 것 같더라고요-!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7/30 16:35
비공개님/ 대체적으로 영어가 없는 메뉴판을 받아들 때 괜히 기대가 된답니다 :) 그리고 제 경험에, 예를 들어 특히 홍콩같은 경우, 식당 간판에 영어 있는 식당보다 영어 없는 식당이 들어가보면 내국인 바글바글하고 음식도 한국 입맛대로만 잘 시키면 정말 맛있더라구요 :)
Commented by 히카리 at 2007/07/30 16:39
오렌지색 좋아하는데 참 예쁘네요. 술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여름 맥주는
참 시원하고 맛있어요>_<! 암스텔담 사람들 참 대단해요. 자전거를 좋아하지만
손 놓고 타기엔 무서워요;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7/30 16:47
암스텔담의 자전거, 정말 손을 놓고 타는 것뿐 아니라 고개를 돌아보면서 얘기를 하고 아기들도 자전거에 유모차 수레를 달아서 데리고 다니고 아무튼 만능이더군요-!
Commented at 2007/07/30 16:5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징소리 at 2007/07/30 16:53
지속적인 맥주 포스팅...^^ 한여름에 정말 잘 어울리는 글입니다 :)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7/30 16:57
헉님/ 자전거가 그냥 자전거가 아니라 정말 너무너무 많아서요. 일일이 잡아내지도 못할겁니다^^ 그리고 실력들이 워낙 너무나 출중해요. 헬멧쓰고 자전거 타는 사람은 1명도 볼 수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

징소리님/ 아무래도 네덜란드라 맥주 포스팅이 이어집니다^^ 곧 다른 나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도 역시 그 나라도 맥주가 유명한 나라 되시겠습니다) 시원하시죠? ^^
Commented by 카미트리아 at 2007/07/30 17:44
다음 나라도 맥주가 유명하다라 독일인가요?

그런데 저는 맥주 안 마셔도 아까전까지 같이 이야기 하던 외국인 이름 기억 안나던데요...
원래 기억 못하는 데다가..이름이 워낙 어려워서..
(특히 프랑스 사람 이름은 정말 발음 흉내내기도 힘들고 외우기도 힘들더군요..ㅠㅠ.)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7/30 18:07
카미님/ 독일 가기 전에도 맥주로 유명한 나라가 있어서... ^^
그리고 외국인 이름은요, 정말 기억하기 어려운 게, 제가 한국 동료들 이름도 못 외웁니다. 방송국에서 누군가 저를 보고 달려오면서 반갑다고 그러면 정말 공황상태에 빠진답니다 ^^;;; 외국인들은 말할 것도 없죠. <유럽과 나의 왼 발> 카테고리를 자세히 읽어보신다면 베르나르도보고 레오나르도라고 삽질하며 사진을 올리는 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ㅠ ㅠ
Commented by 1mokiss at 2007/07/30 18:24
기분좋게 쥐어지는 맥주잔, 백번 동감해요! 생각보다 그런 잔이 많지 않은게 좀 아쉽죠. 우리나라 맥주집이나 동네 통닭집 맥주는 그저 맨날 보는 그 잔들, 요전에 gemini와 제가 딱 좋아하는 작은 크기의 물잔 이야기를 하며, '이런건 잘 안판다'고 했었는데, 맥주잔도 그런 것 같아요. 마우스의 편안함이 컴퓨팅에 미치는 영향도 클텐데, 하물며 맥주잔의 맛은 오죽이나 할까요-
Commented by 꼬깔 at 2007/07/30 19:09
와~ 저 자전거 타는 분 대단하네요. 어릴 적 자전거를 처음 배우고 익숙해질 때쯤 한 손을 놓고 타고, 나중에 두손을 놓고 타곤 했는데 저렇게 여유롭게 대화를 하면서...^^; 더운 날 시원한 맥주 사진을 보니 정말 맥주 한잔이 땡기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7/30 19:17
1mokiss님/ 손에 정말 잘 잡히는 잔 중에서 최고는 제가 얼마전에 쓴 '술집 여자 화장실~~~'글에 나온 '살짝 굴곡이 있는작은 맥주잔' 이 맞습니다 ^^

꼬깔님/ 암스텔담에 가시면 흔하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저도 다시 확인하러 가고 싶네요 ^^ 땡기신 김에 기분 좋은 저녁 추억 만드세요 ^^~!
Commented by Shoo at 2007/07/30 20:09
탕수육에 감자튀김 먹고 왔는데, 맥주를 마실걸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아 시원해보여요-

+ 저도 유럽갈 때 버클리 티셔츠를 하나 가져가야겠어요 ㅋㅋ
Commented by 너른바람 at 2007/07/30 20:49
윗분 말씀처럼 버클리대 티셔츠가 여행 필수품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을 위한 곳, 그런 곳이 오히려 여행자의 발길이 사랑받는 곳이 아니었던가 생각이 드네요. 무엇보다 맥주 빛깔이 인상적이고, 사진 속 맥주의 거품과 잔의 겉을 따라 흐르는 물방울이 그저 눈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청량감을 느끼게 합니다. 광고 카피에 나오는 '눈으로 마신다'는 말은 허언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7/30 22:36
Shoo님/ 탕수육에 감자튀김만으로도 풍족하네요-^^ 버클리 티셔츠 필히 지참! ^^

너른바람님/ 눈으로도 만족감을 먼저 주는 맥주가 있어요 정말... :)... 게다가 많이 걷다가 들어간 바에서는 특히...!
Commented by eastrain at 2007/07/30 23:45
날이 더우니 펍에 앉아 먹던 시원한 맥주가 그립네요. 한국에서는 왜 이런 모습을 보기가 힘들까요?^^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7/31 00:53
일단...펍이라고 할만한 곳들이 오후 늦게 문을 여는 경우가 많아서...밤에 술 마시러는 갈만하지만 낮에 시원한 한 잔 마시기엔 좀 곤란한 문제도 있고... 혼자 한 잔만 입술을 축이기엔 어쩐지 사연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 같고...그런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 그래도 뭐... 우리나라에서도 마시려면야 어딘들 없겠습니까!
Commented by 나무벌레 at 2007/07/31 00:57
네덜란드에서 자전거란, 미국의 자동차같은 거니까요..
전 일년을 탔는데 아직 두 손 놓고는 잘 못타겠어요 ;0;
암스텔....저거 사러 갔다가 암 생각 없이 Malt bier를 사와서 다 버린 쓰디쓴 기억이..ㅠㅠ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7/31 01:02
그립지 않으세요? :)
Commented by 에이미 at 2007/07/31 09:45
주인 의자 밑에 크고 순한 개! 저런 걸 보면 기분이 아주 좋아져요. 며칠 전에 개가 자기 주인의 애인을 질투해서 애인이 키우는 고양이를 자주 문다는 글을 보고 참.. 그랬거든요. 개는 엄청 큰 개고 고양이는 커봤자 5키로니까, 장난삼아 물어도 고양이는 배에 구멍나서 죽기 십상이니까요. 애초에 버릇을 잘 들여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버릇들이는 게 익숙하지 않고, 훈련소에 보내는 것도 어려운 일인가봐요.
그나저나 요새는 왜 이렇게 맥주가 안 땡기는지 모르겠네요.. --;;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7/31 11:14
덩치도 큰 녀석이 있는 내내 저렇게 자세 취하고 얌전히 있더군요. 그러니 다른 손님들이 불평할 일도 없고 대견해보이더군요.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