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7월 17일
삐보는 마셔주고 가시겠다 / 프라하_78
hertravel : 지난번 응급실 선생님이 오늘 다시 오면 걸을 수 있는 장치, 해 주신다고 했는데...
50대 체코 의사 : ?
hertravel : (포레스트 검프가 어렸을 때 다리에 장착하고 달린 그것이라면 여행을 다닐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며칠을 뜬 눈으로 밤을 지샜...지는 않고 뜬 눈으로 잠을 자...안것도 아니네요, 생각해보니 진작에 쌍거풀 수술조차 하지 않아서 눈꺼풀은 너무나 잘맞는 뚜껑처럼 단호하게 닫히는 저였군요) 아무튼 그 장치라면 여행을 계속해서 이탈리아로 갈 수 있겠죠? 와!
50대 짜증난 체코 의사 : 이탈리아? (하며 체코어를 하는 나의 숙소 주인을 쳐다본다)
민박 여주인 : 체체크로바므스타냐스키블라블라...(열심히 통역중)
50대 짜증나고 격노한 체코 의사 : 당신! 당신은 심각하오! 이탈리아! 갈 수 없소!
hertravel : 오! 하지만, 지난번 의사 선생님이 이번엔 걸을 수 있는 장치라고...!
50대 짜증나고 격노한데다 미술 점수 좋지않았던 과거를 가진 체코 의사 : 뭐? 이거욧! (쓱쓱 그린 그림엔 지금의 나와 똑같은 코끼리 사이즈 흰 석고 깁스에 발꿈치 부분 아래에 까만 구두굽만 붙인 그림이다)
hertravel : 아니 이건...!
50대 체코 의사 : 그렇소, 당신, 심각하오. 이탈리아? 허! 한국에 돌아가? 허! 여기, 프라하, 3주일간 누워 있으시오!!
hertravel : 3... 3주일?
의사 선생님, 제가 여기가 계획대로의 이탈리아 남부라면 3주일을 알았습니다,하고 누워있을지도 몰라요. 이탈리아 남부의 늦가을 햇살 아래 저는 저의 코끼리 깁스를 자랑스럽게 내 놓고 책을 읽으며, 여행기를 쓰며 행복한 3주일을 보내겠습니다. 하지만 여기는 오후 네 시면 해가 지고, 사람들이 모스크바 털모자를 쓰고 다니는 스산한 초겨울의 프라하잖아요. 저는 요 며칠 난방도 들어오지 않는 숙소의 침대에 누워 카프카의 마지막 잎새를 쓰고 있었답니다. 조금 더 있으면 프라하의 벽지 디자이너가 될 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저는 그냥 지금 한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네? 한국은 이 깁스로는 갈 수 없다고요? 이 깁스로 비행기를 타면 혈전증으로 심장마비? 생명이 위독한 상태가 올 것이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는데 동의할 수 없다고요? 이 깁스가 아니라 가벼운 조치로 바꿔주시면 안되나요? 네? 제 다리가 앞으로 어떻게 되든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각서를 쓰라고요? 다리가 앞으로 어떻게 되든 상관 않으시겠다고요? 알았습니다, 그래도 3주일동안 이 도시 뒷방에 누워 있는 것은 많이 힘들어요. 무엇보다도 선생님과 의사소통이 안 돼서 제가 지금 뼈가 부러진건지 아닌지, 인대가 끊어졌다는건지 찢어졌다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고 누워있는게 더 찜찜한데 선생님이 한가지 단호하게 말씀하시는게, 심각하다, 고 하시니 저는 한국에 돌아갈래요, 네, 지금 각서 쓰고 있습니다... 석고 깁스를 푼 붕대 다리를 해 주시네요, 아, 저 석고는 버리지 말고 저를 주세요, 제가 이 석고틀 안에 다리를 편하게 넣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민박 여주인은 나에게 의사 대신 자기가 미안하다며, 여기 체코의 의사들은 한달에 70만원밖에 못 벌고, 환자에게 뒷탈 없는 최선의 진단을 내리지 않으면 국가가 의사에게 책임을 묻는다며, 그래서 의사들이 서비스 마인드가 없으며 친절하지 않다고 열심히 설명한다. 대신 체코 국민이라면 누구나 거의 무료로 의료 혜택을 본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외국인이라서 돈을 다 내지만 그래도 한국 의료보다는 더 싸지 않냐며 위로 한다. 아, 그렇구나, 내가 정말 여행을 하다하다보니! 사회주의 의료 체계까지 체험을 하네!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순 없다! 삐보는 마셔주고 가시겠다!

'삐보'는 체코어로 '맥주'다.
#3 오늘, 프라하 공항, KAL 카운터


공항에 도착하니 대한항공 현지 직원이 내 휠체어를 밀어준다. 출국 신고하는데 사람들은 줄을 섰지만 나는 장애인 및 vip를 위한 속성 코스로 직행, 완전 급행 코스로 수속을 마치고 그 직원은 대한항공 탑승 게이트까지 나를 밀어주고 사라졌다. 그 다음, 비행기에 탑승할 때 의례적으로 제일 먼저 퍼스트 클래스부터 탑승하게 마련인데 준장애인 혹은 요주의 승객이 된 나는 특별하게 제작한 리프트같은 것에 실려 제일 먼저 빈 항공기 내 자리로 이동됐다. 그리고 만석에 모두 앉아가는 그 비행에서 나는 누워서 갈 수 있었다. 누워가지 않으면 의사가 경고한 심장 위협 혈전증 때문에 골치아파질까봐서였다.
한국에 도착하자 대한항공 직원이 나와서 나를 휠체어에 앉혔고, 공항 앞 택시타는 곳까지 직접 입국, 세관 신고를 다 도왔다. 내가 이 얘기를 하면 나 못지 않게 불량한 인생관을 가진 나의 친구들은, 야, 깁스에 마약이라도 숨겨오면 되겠다, 검사도 안한다니...라고 범죄적 두뇌를 발휘했다. 하지만 더욱 불량한 인생관을 가진 나는 이미 마음 속으로 테러리스트들이 이런 루트를 개발하지 않은 것에 대해 바보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이렇게 나의 "유럽과 나의 왼발" 여행은 중간에 허리가 꺾였다. 한국에 도착해서 그 날로 간 병원에서는 인대만 상한 것이 아니라 골절상임을 확인해 주었고, 그 이후 나는 한 달 이상을 제대로 걷지 못했다.
정말 특이한 여행 클로징이 아닌가? 여행을 많이 다니다보니 점점 이런 저런 확률이 높아져서, 경미하나마 비행기 사고도 겪어 봤고, 메뚜기 떼에 습격을 당해 되돌아온 적도 있고, 비자가 제 때 나오지 못 해 미합중국 안가에도 가 본 적이 있지만, 중간에 다리 뼈가 (보험 회사 창구 앞에서 말을 파종한 것처럼) 똑 부러져 여행을 중간에 그만두다니, 이런 여행은 또 처음이다.
여기에 제목을 달자니 유명하신 자전적 저자 크리스티 브라운님께는 죄송하지만 이렇게 나의 2005 늦가을 유럽 여행기는 "유럽과 나의 왼 발" 이란 타이틀이 걸맞는 추억이 된 것이다.
# by | 2006/07/17 18:35 | 유럽과 나의 왼 발 (2)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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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서 여기서 저기까지 걸으세요'
LA공항의 경찰은 신의 힘을 가지고 있는게 틀림없습니다. 제가 걸었거든요..
(양쪽에서 팔을 잡고 들어올려서 발은 땅위 2mm쯤에서 흔들리기만 했지만요.)
다 나으신거죠?..
재활치료를 제대로 안해서 몇년간 축구를 못했던 기억이..ㅠㅠ
체코에서 겨울이라면 확실히 생존의 위협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확실히 기억에서 잊혀지질 않을 여행이겠지만....
웬지 전 좀더 오래 여행하셔서 좀더 글을 읽을수 있었음 좋았을것을 이라 생각하게되었습니다.
까날님/ 체코 맥주, 좋습니다. 맛있습니다. 깔끔하고요.
Chalie님/ 미국 공항 검색대분들... 저는 안 좋은 기억이 있답니다... 9.11뒤에 갔을 때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제 몸에서 삐 소리가 난 겁니다. 알고보니 생각지도 못 한 샌들 뒷축에 금속심이 박혀 있었는데... 미국애들은 몸에 손 대는 거 정말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이 갑자기 사람을 소리르 지르면서 어깨를 밀쳐대더라구요. 정말 불쾌했지만 그런 사람들한테 어필하면 비행기타는거 지연될까봐 꾹 참았습니다
ssen님/ 네...그렇게 여행이 끝났답니다... 별의별 이유로 여행의 급반전을 겪어봤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습니다.
ARMAN님/ 정말 고생이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여행을 해서 오스트리아 비엔나와 짤즈캄머굿과 이탈리아까지 내려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쉬움이 많은 여행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유레일 30일치를 끊어갔기에 손해도 막심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