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마지막 잎새 / 프라하_74

독일어로 소설을 썼다지만 카프카는 체코인이었다. 카프카의 소설이 어디서 왜 어떻게 뛰쳐 나왔는지 알 만하다. 나 역시 한 마리 거대한 바퀴벌레로 누워 있다. 발에 천근만근의 국립 병원 제작 석고 부츠를 장착한 채 누워서 숙소의 창밖을 쳐다본다. 오늘따라 갑자기 추워졌다. 숙소는 낮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는 으슬으슬 못견딜 정도로 춥다. 어제의 밝았던 낮이 갑자기 오늘부터 어둡고 싸늘해졌다. 하룻만에 갑자기 겨울이 엄습했다.

빈방에 혼자 깁스한 다리를 올리고 누워 있다보면 우울한 느낌이 든다. 앞으로 겨울 유럽에서 난방 없는 방 안에 혼자 침대에 묶여 누워본 적이 없는 사람이 '싸늘하다'라는 단어를 쓴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따지고 들 것 같다. 당신이 싸늘하다는 느낌을 정말 아느냐고.

사실 한 여름에 유럽으로 여행을 갔을 땐 몰랐었다. 여름이 점령한 중부 유럽의 햇살, 그건 fake였다. 유럽의 스산함과 싸늘함과 궂은 날씨와 우울함은 여름을 제외한 대부분의 날들동안 대륙을 점령하는 것 같다. 영국 출장길에 그 음산함에 기가 질려 혼자 프랑스로 넘어갔던 적이 있다. 그토록 사랑하던 나의 파리마저도 내가 있던 며칠을 두고 내리내리 늦겨울비만 추적였다. 그 비를 맞으며 혼자 돌아다니자니 '멜랑콜리' '호망틱' 이런 단어가 아니라 축축한 신발에 질척이는 젖은 낙엽만 죽자고 나를 따라다녔다. 냉장고에 이틀 넣어 놓은 묵은 찬밥 맛같은 그런 경험을 다신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번엔 더 처절하게 혼자 동유럽의 스산한 초겨울을 맞고 있다.

'오 헨리도 다리에 깁스를 하고 누워 지낸 늦가을이 있었던 걸까'

동구 문학은 아니지만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것도 알 것 같다. 꼼짝없이 누워서 있다 보면 창밖 나무의 낙엽 달린 모습에 자꾸 눈길이 간다. 석고로 미셰린 다리가 된 그 위에 찬 찜질을 한다고 냉동실 야채팩을 올려놓고 말이다. 냉동실 야채팩은 친절한 민박 여주인께서 체코식이라며 갖다준 것이다. 얼음 찜질을 하면 물이 녹아 깁스 위가 엉망진창이 돼 버리겠지만 냉동실에서 꽁꽁 얼어있던 비닐 포장 야채 상품이나 냉동 프렌치프라이 비닐 봉지를 깁스 위에 올려 놓고 있으면 냉기도 오래가고 녹아 흐르지도 않는다. 다시 냉동을 시키고 다시 찜질에 쓴다. 체코인의 생활 상식이군.

카프카의 나라 체코에서 거대 흰 코끼리 석고 다리 위에 체코 야채팩을 올려 놓고 창 밖의 낙엽을 보면서 미국의 오 헨리 소설을 떠올리는 부조화의 극치. '유배지가 따로 없군.''이건 유형 일지야, 유형 일지...!' 얼씨구, 이젠 정약용까지 왔다. 조금 더 하면 목민심서 한 권은 쓰겠다.

좁은 창 밖으로 잡초가 무성해 황량한 뒷뜰을 바라 본다. 첫 날, 자연스럽게 무성한 편안한 정원이라고 생각했던 그 곳과 같은 곳이다. '마음이 잡초밭이니 세상이 온통 잡초밭이군' 교장 선생님도 모르시는 오늘의 명언 탄생이다. 목발을 짚고 낑낑 방을 나가 뒷마당으로 통하는 뒷문에 서 있자니 40도가 넘던 스페인의 여름 햇살, 방콕의 무더운 여름 밤, 심지어 '유럽 100년만의 폭염'도 그리워진다. 목발을 짚고 방으로 돌아온다. 오후 4시 30분에 세상을 마감할 듯이 어둠이 내려버린다. 동구의 스산한 11월 앞에 꼼짝없이 갇힌 유형수는 까닭없는 불길함에 견디기 힘들다. 잠을 청해 보지만 내 깁스 무게에 스스로 눌려 켁켁거리며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

by hertravel | 2006/07/13 18:32 | 유럽과 나의 왼 발 (2) | 트랙백 | 핑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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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HerTravel의 지구 한 .. at 2007/08/01 22:39

... 위로삼아 해 준 말들이었다. 그래도 친구들아, 그나마도 우여곡절끝에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성공해 치료받던 나의 그 기쁨은 몰랐을거란다.오후 네시면 해가 지는 십 일 월의 프라하에서 싸늘한 민박집 침대 속에 떨며 카프카의 음울한 소설이 어디서 걸어나왔는가를 깨닫는 그 순간이 얼마나 비이참한지, 손대지 않은 아름다움이라고 추켜 세웠던 뒷 ... more

Commented by 나이트엔데이 at 2006/08/29 09:16
글 정말 맛깔나게 잘 쓰시네요. 이런 여행블로그를 꿈꾸는 저로서는 많이 배워야겠습니다.
Commented by 마르 at 2006/08/29 09:26
호주의 겨울도 상당히 우울하답니다. 그나저나 정말 유배지 생활이셧군요.
Commented by 하얀새 at 2006/08/29 12:15
글이랑 사진만 보고도 유배 생활의 그 느낌이 확 와닿는데요~
위로를 드려할 글인데..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요;; 죄송합니다ㅋㅋㅋ;;
Commented by 분홍복면 at 2006/08/29 15:44
정말 글이 재미나요. 우울하신데 저도 왜 이리 웃음이 나오는건지..
제가 가장 우울하게 경험한 유럽의 도시는 베를린이었는데. 물론 다리가 부러진 건 아니었구요. ^^;;
Commented by ARMAN at 2006/08/31 00:19
아 저도 여행을 많이 다녀보면 이렇게 글을 잘 쓸수있을까요?
아님 글을 막 쓰다보면 언젠간 잘쓸까요?
죄송하지만 재밌게 잘 봤습니다.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6/08/31 23:39
나이트엔데이님/ 고맙습니다~ 사실 텍스트가 주저리 주저리 있는 편이라서 그냥 읽기엔 부담스러운 블로그이기도 한데 좋게 말씀해주시니까 기분이 좋습니다.

마르님/ 겨울에 호주에 간 적이 있습니다. 파카를 껴입고 블루마운틴인가 거기 갔는데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던 기억이...

하얀새님/ 제 친구들도 가족들도 걱정은 하면서도 일단 웃었습니다 괜찮습니다 ㅋㅋㅋ

분홍복면님/ 누구에게나 우울의 도시가 있나 봅니다. 저는 정말 프라하만큼 우울한 도시가 없을 것 같습니다. ㅠ ㅠ

ARMAN님/ 칭찬 너무나 감사합니다. 사실 제 직업이 작가라 제대로 글을 잘 쓰려면 훨씬 더 잘 써야 하는데 그냥 이 정도랍니다~ 깊이도 모자라고 맛도 어중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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