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7월 03일
뉘른베르크에 주어진 단 세 시간 / 뉘른베르크_64

기차역으로 가는 트램 안의 모습. 무임승차의 죄악을 저지르고 민망한 얼굴로 슬쩍 하차 만행을 저질렀던 것도 불과 엊그제의 일, 그 때 사 놓고는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펀칭을 하지 않고 내린 그 오욕의 티켓을 이번엔 뿌듯하게 팡,팡, 펀칭기에 집어 넣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순간의 민망함을 선택했던 나의 과거가 사라지지는 않으리니. 트램 안, 날카로운 눈을 가진 어느 현지 승객의 눈에는 과도하게 뿌듯한 표정으로 펀칭을 하는 이 외국인 관광객의 모습이 '과오를 잊으려는 과잉 행동'으로 딱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아아 범죄 현장을 다시 찾은 범인은 무엇을 해도 어색한 법!

뉘른베르크로 가기 위해서는 Freiburg에서 Karlsruh까지의 구간을 독일의 고속 열차인 ICE 구간으로 이동하고 기차를 한 번 갈아타야 한다. 뉘른베르크는 무역 박람회로 숙소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을 어제 검색으로 뒤늦게 알았다. 그래서 하루 묵어가려던 원래 계획과는 달리 잠시 세 시간쯤만 뉘른베르크에 들렀다가 곧장 체코 프라하로 가는 긴 구간의 기차 여행길에 올라야 한다.

기차 식당칸의 높은 가격에 비해 빈약한 음식들이 갑자기 뇌조직에 떠오르면서 나는 프라이부르크 기차 역 지하 수퍼에서 후다닥 음식장을 보았다.
좋아하는 독일 햄과 에멘탈 치즈, 글씨도 읽을 줄 모르는 외국어가 쓰여진 우유 앞에서 이게 우유일지, 저지방 우유일지, 아니면 요거트일지, 젠장, 유럽 요거트는 완전 우리나라 청국장 수준이란 말이지, 중얼거리면서 아슬아슬한 뽑기를 하는 기분으로 하나를 골랐다. 이렇게 우유 뽑기를 한다든지 한국에서 먹을 수 없었던 올리브 박혀 있는 햄이라든지를 수퍼마켓 식품 코너에서 고르는 시간은 그것만으로도 온전히 외국 여행길의 훌륭한 관광 코스가 된다.
'이 정도의 양이면 세 도시 정도는 무사 통과지.'
그렇게 뉘른베르크 역에 도착했다. 여행짐은 역 안의 대형 코인 락커에 넣어 놓고 일단 티켓 창구에서 체코 프라하로 들어가는 기차표를 샀다. 체코는 유레일 티켓이 통용되는 국가가 아니라서 이 곳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독일 체코 국경 지역인 cheb까지는 그냥 갈 수 있지만 cheb부터 프라하까지의 체코 구간은 돈을 내고 티켓을 사야 한다.
독일에서 이렇게 미리 체코 지역 기차표를 사면 수수료등 더 비싼데도 여기서 미리 사는건 국경 지역에 가서 체코 역무원을 만나면 바가지를 요구하기도 하고 그래서 더 비싸지기도 하기 때문에 일부러 얼마를 더 주더라도 맘 편하게 가려는 것이었는데 으왓, 3만 5천원이나 한다. 아니, 뭐가 이렇게 비싸지?
* 티켓을 사면서 '그러므로 체브cheb에서 프라하 구간을 편도로 한 장 주세요' 했더니 표를 주는 여자가 구시렁거리면서 '체브? 체브가 아니고 헤브죠' 한다. 아 이 까칠한 독일 여성님! 나도 모르게 '모르는 곳인데 발음까지 정확하게 알긴 어렵잖아요'하고 잔잔하지만 지지않게 대답하고 나왔다. 항상 웃으며 다니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여행을 하다보면 속이 좁아지거나 피곤때문에 날카로와질 때도 많다. 세상에 자중자애하라 스스로 그리도 누차 일렀거늘.
* 체코의 공식 화폐는 유로화가 아니라 코룬. 프라하에 도착한 뒤 현지에서 환전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한데도 내가 타고 갈 기차는 밤중에 프라하에 도착하는 관계로 최소한의 금액을 어차피 환전해야하기에 뉘른베르크 역에서 환전. 프라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그럼에도 독일에서의 환전은 완전 아깝도다'를 외친다.
* 뉘른베르크 역 안의 화장실은 내가 가 본 유료 화장실 중에서도 특히 더 깨끗했다.

나는 이 우람한 기차 역사를 등 뒤로 하고 서서 서울 올라온 시골 쥐처럼 눈 앞의 넓은 이 찻길과 빠르게 지나는 차량들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것 보세요, hertravel님아, 당신이 살던 서울이란 도시도 역 앞 10차선과 우람무쌍한 대우 빌딩을 기차 여행의 첫 인상으로 갖고 있는 곳이야. 왜 그렇게 얼어붙은 거야. 그 새 유럽의 오밀조밀한 길 크기에 익숙해졌다는 거야 뭐야. 따지고보면 이제 고작 여행 열흘째가 아닌가?
단 세 시간쯤의 여유를 갖고 역사를 빠져나왔다. 역사 앞은 뻥 뚫린 대로로 도대체 시내는 어디서 시작하는 건지, 지도 한 장 없이 이 도시에 주어진 단 세 시간을 '잘' 즐겨야 할 텐데 눈 앞의 단서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역을 등지고 한동안 나만의 정적 속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눈 앞의 건물들은 장식 하나 없이 '이게 실용입니다, 아셨습니까'라고 말하며 우뚝 서 있어서, 독일이 아니고서야 그 어디서 이런 분위기의 건축물을 기대할 수 있으랴, 도이칠란트 정신을 온 몸으로 느끼고 서 있었다.
저 건너편은 두툼한 성벽으로 막혔고, 어디로 가야할지, 길은 어떻게 건너야 할지, 저 성벽은 무슨 고성 호텔이냐, 그러다 그냥 일단 가 보기로 했다. 세 시간 중의 십 분이 흘렀다.
# by | 2006/07/03 18:30 | 유럽과 나의 왼 발 (2) | 트랙백 | 핑백(2)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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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냥 우리나라에서 먹는 달콤한 요거트 말고도 우유를 발효시킨 그 자체의...반고형 막걸리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요거트도 있기에 유제품을 선택할 때 제비뽑기 하듯이 우유뽑기를 잘 선택해야 한다. 그 막걸리 요거트도 맛들이면 먹을 만하다. 여행 다니는 동안 변비때문에 고생하는 친구에게는 억지로 먹이기도 한다 흐흐.6) 진짜 치즈도 한 ... more
마르님/ 그러게요. 혼자 쑥스러운 겁니다. 혼자 생각해도 너무 떳떳하게 펀칭하는 것도 민망하고요 ㅋㅋ
Yuel님/ 와 말 됩니다. voll이 홀! milch는 정말 밀크겠네요! 저도 유럽 여행 계획할 때는 항상 '이번엔 한 나라야'라고 시작해서 결국 한 바퀴를 또 돈답니다 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