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게스트하우스, 흑림장 / 프라이부르크 black forest hostel_54

 
ALDI 수퍼에서 사 온 독일 맥주.
아직 작은 플라스틱 병맥주가 한국에는 나오기 전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값도 무척 싸서 샀는데 정말 맛은 영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의기소침, 좋지 않은 마음
그리고 어떤 찰나의 깨달음.
그들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골치아픈 패거리들이라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 모두를 정중하게 대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비워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두운 생각,부끄러움,악의.
그들도 문 앞에서 웃으며 들어오라 청하라.
누가 찾아오든 감사하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

-잘랄루딘 루미

게스트 하우스의 계단에는 루미의 시가 적혀 있고 앞에는 그럴듯하게 꽃잎과 양초가 놓여 있었다. 그렇다, 내 삶엔 매일 매일 다른 손님이 찾아온다. 가리지 않고 손님을 받아들이는 게스트하우스처럼 열린 마음, 여행에는 그것이 필요하다.

모두가 자는 듯한 독일 작은 도시의 저녁이지만 알고보면 모두가 깨어 있듯이 나의 위장도 팔팔하게 깨어 있었다. 저녁을 먹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미처 못 먹고 이동하고, 숙소 잡고, 먹을 것 사고, 초컬릿 집이며 태권도 집이며, 구경만 하고 돌아온 나에게 흑림장의 키친은 신데렐라가 찾아간 궁전의 무도회장보다도 더 반짝이는 듯 보였다.


와 이건 뭐, 영국의 제이미를 불러 제이미가 그토록 사랑하는 코리앤더가 팍팍 들어간 생선 요리라도 해야할 것 같은 분위기! 이 숙소의 주방은 자기 손으로 음식을 해 먹을 수 있게 해 놓은 곳이다. 나름대로 법칙이 있다. 음식할 때 가스 환풍기를 틀어야 하고, 다 먹고 나면 접시를 식기 세척기에 꽂아 놓아야 한다는 너무나 간단한 법칙이다. 이 곳에서 나는 ALDI 수퍼에서 사 온 맥주를 식사로 마시기 위해 같이 사 온 뉘른베르그 소시지를 익혔다. 어차피 도시를 옮기면 상할 음식이라 한꺼번에 다 요리해 버렸다.



가방 맨 아래에 깔려왔던 누룽지가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본다. 누룽지를 물에 불려 끓였다. 그리고 내가 항상 긴 여행을 가는 친구들에게 권장하는 오뚜기의 건조 시금치 된장국 스프 블럭을 넣었다.

며칠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엄청난 양의 식사! 이 것이 모두 이 게스트하우스의 미덕이다. 두 대에 달하는 공동 냉장고에 자기 음식을 얼마든지 넣어 놓을 수 있다. 매직으로 이름만 써 놓으면 된다.

프라이부르크의 게스트하우스 흑림장 Black Forest Hostel에 나는 푹 빠지는 느낌이다.

게시판에는 꽤 오래 머무는 사람들이 짧은 알바 거리를 찾고 있고 어떤 일본 여자 여행자가 자기에게 돈을 내고 일어를 배우고 싶은 여행자를 찾는다는 쪽지도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남자 여행자들에 둘러싸여서 웃고 있는, 여행자라기엔 너무나 깔끔하고 인어공주 라인의 스커트와 깔끔한 스웨터, 완벽한 화장을 한 일본 여자애를 수시로 이 게스트하우스 안에서 볼 수 있었다. 그렇다, 유럽을 여행하는 여행자들도 유럽에서 일어를 배우고 싶을 수도 있는 거지)


 (주방에 있는 냉장고엔 자기 이름을 적어서 음식을 넣어 놓는다)


(식당의 모습. 상온에 저장해도 되는 음식물은 책장 모양 찬장에 놓아 둔다)


(오락실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자, 다시 잘랄루딘 루미의 시로 돌아가자, 

'그 모두를 환영하고 받아 들이라'

아무 손님이나 다 겸손하게 반기며 맞이하는 그런 여인숙같은 인생이란 얼마나 성스러운가. 실제 이 여인숙엔 나와 같은 정체 불명 아시안이 몇 명 있고, 며칠을 위해 들이닥치는 여행자들이 있고, 지금 몇 달째 이 곳에 머물고 있다는, 스쳐 지나는 여행자들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 취미가 되신 미국인 할아버지가 계시고 (아무래도 미국에서는 흔하지 않은 스타일이시다), 꼬랑지를 내려뜨린 헤어 스타일을 한 거구의 여행자가 소심하게 뒤적이며 뭔가를 볶아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꽤 오랫동안 꼼지락 꼼지락 요리를 하던 남자. 머리 모양이나 두터운 손에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아주 오래 걸려서 요리를 했다. 하도 시간이 오래 걸리길래 나도 은근히 기대가 됐다. 뭔가를 잔뜩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나눠줄지도 몰라. 그럼 나도 내게 너무 많은 뉘른베르그 소시지를 나눠야지...! 그런데, 나중에 완성품이 나왔는데... 샌드위치였다. 

분명 이렇게 갖가지 인생들을 한 품에 안아 오늘 또 하룻밤을 지나는 게스트하우스야말로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잘랄루딘 루미式의 결론을 내려야 하나? 그렇게만 끝났다면 나는 이 흑림장을 애증이 아닌 애정으로만 기억했을텐데 이 곳에서 나는 정말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손님을 만났다. 그 손님은 휴머니즘과는 전혀 상관없는 증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그런 분이었는데...

벼룩이신가, 빈대이신가... 이 깊은 한숨...벼룩이 물은 것은 모기와 달라서 더 미친 듯이 가렵고 뭐라고 말 할 수 없는 묘한 불쾌감이 든다. 단단하게 뭉쳐서 뾰족, 빨갛게 물린 자국이 확실하고, 이 녀석이 환희에 겨워 돌아다니다 심심하면 한 번씩 빨아 드시고 하셔서 일정 간격으로 자국이 남았다. 모기와 또 다른 점은, 꼭 정맥이 지나가는 자리 위로 한 땀 두 땀 세 땀 간격으로 연속적으로 남은 이 놈들의 자국은 흉터로 꽤 오래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곳에, 벌레가, 너무 너무 많았던 것이다. 하룻밤에 스무 군데가 넘게 물리고 말았다. 울고 싶었다. 인도에서 5백원짜리 방에서 잘 때에도 이렇게 심하게 물린 적은 없다.

유럽,유럽,유럽...!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잘 사는 유럽에 의외로 벼룩이 꽤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2003년에는 유레일 기차 시트에서도 벼룩에게 쏘였다. 같이 탄 오스트리아 사냥꾼 할아버지의 야생 사냥개에게서 벼룩이 나 좋다고 옮겨와 톡 쏴 주셨다. (그런 일이 있으면 다음 기착지 숙소에 내리자마자 입고 있던 옷을 홀랑 다 벗은 뒤 세탁을 맡기거나 세탁이 여의치 않으면 비닐주머니에 넣어 청테입-여행갈 때 필수품이다-으로 완전 밀봉하고 샤워 뒤 새 옷을 꺼내 입는다)

그리하여 애정으로 시작해 증오로 남은 프라이부르크의 흑림장! 나는 고즈넉하게 4.4조의 정형시를 읊으련다.

멍멍이와 먹고자고 신발신고 앉고눕고
냄새나면 빨아야지 페브리즈 웬짓인가
매트리스 백년쩔어 것만번듯 벼룩빈대
대명천지 개명국가 벼룩빈대 천지였네
 

by hertravel | 2006/06/23 18:16 | 유럽과 나의 왼 발 (2) | 트랙백 | 핑백(1)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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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벌레 녀석은 피맛의 환희에 겨워 돌아다니다 심심하면 한 번씩 빨아 드시고 하셔서 일정 간격으로 자국이 남긴다. 모기와 또 다른 점은, 꼭 정맥이 지나가는 자리 위로 한 땀 두 땀 세 땀 간격으로 연속적으로 자국을 남기는데, 자국도 징그럽지만 흉터로 꽤 오래 집요하게 남아 있다는 점도 징글징글하다." -'애증의 게스트하우스, 흑림장' 중에서.</a></a></a></a></a></a></a></a> ... more

Commented by clytie at 2006/08/13 22:40
한국에 태어나서 한국에서 쭉 자라는 동안 벼룩을 한번도 못봤고 물려보지도 못했어요.^^; 그리고 여행갔던 일본, 미국, 말레이시아 모두에서도 벼룩은 못봤는데 독일에 벼룩이라니...;; 상상도 못한일이네요!!!
Commented by 악덕지주 at 2006/08/13 23:12
저 남자는....모호크군요;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6/08/13 23:32
clytie님/ 그러니까 말이죠, 벼룩에 대해서는 유럽이 인도보다도 못하다는 놀라운 사실!
악덕지주님/ 아.. 그러니까 저 남자분의 머리 모양을 보고 모호크라고 하는 거군요! 그런데 저 분 말이죠, 단지 머리 모양이 터프할 뿐이지 정말 소심한 그런 스타일 같았어요. 아이러니...
Commented by raoh at 2006/08/13 23:47
아하 저 '싼' 맥주 저도 먹어봤습니다. 한 2년전쯤에 독일에 있을때 다른 가게는 다 문닫아서 맥주를 못 샀죠. 결국 한 마트에서 저 맥주 한 박스를 샀는데... 역시나 맛은 ... ㅎㅎ 더구나 플라스틱 병이라 그런지 한 이틀 지나니까 맛이 좀 변한거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ㅡㅡ
Commented by 이시미 at 2006/08/14 03:34
"냄새나면 빨아야지 페브리즈 웬짓인가" 수강신청하려고 밤새는 와중에(아침에 일어날 수 없는 체질이라서요;) 정말 배꼽잡고 웃고 갑니다.
Commented by 마르 at 2006/08/14 10:15
그렇죠. 벼룩이 빈대... 텔레비젼 광고에 벼룩, 빈대 퇴치약 광고도 심심찮게 볼수 있죠. 으에에에....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6/08/15 00:11
raoh님/ 드셨군요 드셨군요~ 역시나 맛은 말입니다~ 아... 한 끼의 독일 맥주가 아쉬운 저 때에 왜 저런 것을 사 먹었을까 후회했습니다.
이시미님/ 그러게나 말입니다. 페브리즈가 웬 짓입니까. 한국 기준으로 보면 서양의 주거 생활은 어딘가 깔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르님/ 그렇군요, 심지어 텔레비전 광고에도 나오는 벼룩 빈대 퇴치약...! 인도만도 못 한 취침 환경!
Commented by JOKER at 2006/08/16 16:02
유스텔 묵다보면 의아한 풍경과 맞닥뜨리는 경우가 적지 않은것 같아요.
그 한 예로 5박을 하던 프라하 유스에서는 애들이 일어나서 샤워는 하지 않고 온 몸에 데오도란트 스프레이를 그야말로 '쳐' 바르던 걸 봤을때의 컬쳐쇼크란..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6/08/18 03:53
JOKER님/ 와하하 정말 그 장면이 대표적인 것 같아요. 씻지 않고 데오도란트로 전신 샤워하는 그들, 세제로 설겆이하고 물로 헹구지 않고 닦는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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