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밤에 태권도를 하는 독일인들 / 프라이부르크_53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야간 활동을 하는 분들은 다만 "야밤에 초컬릿을 먹는 사람들의 모임"뿐만은 아니었다. 5분 정도 더 걸어갔을까, 이번엔 상가 한 쪽의 전면 유리창이 환하다. 그리고 이번엔 한글이다!


태,권,도, 그리고 권,재,화 라는 이름. 세계 어디에서 만나도 항상 태권도 도장은 "태권도"라는 한글을 내세우고 있다. 정말 이런 나라의 이런 곳에도 태권도장이 있느냐 싶을 정도의 곳에서도 홀연히 나타나는 강인한 의지력의 우리 대한의 자랑, 태권도장! 그리고 그 곳의 푸른 눈 수련생들은 자기들의 관장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해서 '우리 관장님이 킴 아무개라'고 자랑하며 나의 당연한 리액션을 기대하기때문에 '한국 사람이라고 당연히 태권도를 알 리는 없는' 나로서는 표정 관리가 쉽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나는 관장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진지한 표정에 눈에 남십자성 모양의 빛을 반짝이면서 사부 大 마스터 킴 관장님의 이름에 경의로움을 표한다.


또다시 성냥파는 마녀가 되어 창 안을 들여다보니 이번엔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독일 소년 한 명이 나와서 열심히 뭐라고 말을 건다. 이 금발 소년의 말은, 만일 내가 태권도에 관심이 있으면 여기서는 평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수련 시간이 있으니 마음 놓고 언제나 찾아오라. 그리고 자기 이름은 무엇인데 와서는 꼭! 꼭! 꼭! 자기 이름을 대고 자기가 초청했다고 말하란다. 후후후 이 먼 독일의 프라이부르크의 태권도장에서도 추천 마케팅이 살아 있구나!

괜히 한 번 무슨 띠냐고 물어봤는데 (외국인에게 너 태권도 "벨트의 컬러"가 뭐냐고 묻는 이상한 기분) 조금 새초롬하게 자기는 "비록" 지금 노랑띠지만 중간에 잠시 쉬어서 그럴뿐, 같이 시작했던 친구들은 붉은띠라고 굳이 굳이 강조를 한다. 귀엽다. 나도 태권도를 했으면 아는 척 했을텐데 그나마 마셜 아츠라고 배운 것이 합기도인데다가 그나마도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말이 나온 김에 말인데, 정말 순수하게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 하나로 합기도가 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끊고 몇 달을 다녔을 때의 얘기. 이 합기도라는 것이 생각보다 꽤 재미있다는 것이다. 일단 '도'가 무엇이고 '정신 합일'이 무엇이고 이런 고차원적인 블라 블라 군소리가 없다. '국가에 충성' '사부를 존경' '싸움은 안 한다' 이런 화끈한 모토를 내세워서 마음에 들었다. 자질구레한 겉 멋이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발차기를 주로 하는 공격이라 마음 슬픈 일이 있어서 눈물 그렁그렁하던 날이라도 일단 도장에 들어가서 발을 쎄게 도복 자락 휘날리며 (도복은 발차기를 하면 바람 휘날리는 소리가 나도록 만들어졌다) 두어번 허공중에 내지르고 나면 그 연약하던 눈물 그렁그렁의 마음이 순식간에 건실한 스포츠맨쉽으로 다,부,지,게 채워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게다가 합기도는 '실제 대결 상황이 일어났을 경우'를 가정한 무술이라, 배우다 보면 이런 이야기도 자주 듣는다. "자~ 상대를 만났다, 그럼 괜히 주먹질 하지 않는다, 일단 상대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고 흔든다. 발은 신발을 신었을 경우, 발바닥의 밑이 아니라 옆면을 이용한다!, 만일 상대가 칼을 들었을 경우엔-" 큭큭... 같이 배우는 중학생들은 진지하기만한데 나는 혼자서 몰래 피식피식 웃곤 했다.

그리고 이날 떠올랐던 기억중에 이건 좀 깜짝 놀랐던 일 중의 하나. 오래 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갔을 때 북한 음식점을 찾아 지나가는 사람도 한 명 없는 뒷골목까지 흘러들어간 적이 있었다. 정말 단 한 명의 사람도 없는 적막한 골목에서 눈 앞에 한글이 그 때도 또한 갑자기 나타난 거다. 이미 폐쇄된 지 조금 지나 보이는 태권도장이었다. 태권도, 라고 한글로 써 있었다. 그런데 그 '태권도'라는 글씨체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그 글씨체인 것이다. 태권도장이면 당연히 붙어 있는 건곤감리청홍백의 태극기도 보이지가 않았다.

'북한... 태권도...?'

당시 여행을 같이 하던 나와 친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추리에 들어갔다. 태어나 단 한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이상한 나라 토끼굴에 떨어진 앨리스처럼 어리둥절 한참을 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같은 한글을 쓰고 같은 태권도를 외국에 수출하는 같은 얼굴의 다른 나라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 곳을 잘 아시는 분께서 도움 주신 말씀을 볼 때 거리의 정황상 그 곳이 북한 태권도장이 아니고 한국계 태권도장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도저히 한국형이 아니라고 느껴졌던 폐쇄된 도장의 디자인이나 그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글씨체도 유럽 이민 업체의 글씨체가 어찌 그렇게 쓰여졌던 거였던 건가. 그리고 관장님께서 마침 태극기가 낡아서 교체하느라 잠시 태극기를 내려 두시고 영업을 하셨는지도. 그 태권도 도장이 결국 south였든지 north였든지, 나는 세상에 또 하나의 Korea가 존재하고, 세상의 다른 곳에서 같은 밥과 반찬을 팔고, 같은 태권도를 팔면서 공존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당황했던 것이다. 머릿속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눈 앞에 그 광경을 본다는 건 너무나 어색하던 그 시절이었다.

(아래 사진은 오래전 그 여행 당시 골목에서 찾아낸 평양 식당의 벽면 장식과 냅킨 사진)

by hertravel | 2006/06/22 18:15 | 유럽과 나의 왼 발 (2) | 트랙백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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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chungsuk at 2006/08/13 01:31
곧게 편 손바닥에서 다부짐이 느껴지네요.
Commented by sikh at 2006/08/13 02:05
북한이라뇨! 조선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하셔야...(...)
Commented by 길잃은아이 at 2006/08/13 03:2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닌가 싶은데요;;

북한도 외국에 태권도장을 만드는군요. 놀랄일이 아닌데도 놀라워요.
Commented by Charlie at 2006/08/13 03:47
저 자세는 태극 2장이던가 3장이던가.. 가물가물하군요 이제는. :)
Commented by 란씨 at 2006/08/13 10:37
순간 '천재와 태권도'??? 라고 생각을 -_-;
추천 마케팅은 역시 세계를 누비는군요
10명 추천을 받으면 띠를 올려준다던지~ ^^;;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6/08/13 10:43
chungsuk님/ 말씀 듣고 사진을 자세히 보니 정말 진지하게 열심히 하는 중이네요. 보기 좋은데요.
sikh님/ ^^ 실제로 만나서 얘기하면 이도저도 서로 불편할까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북쪽은...남쪽은...이라고 얘기하게 되더라고요
길잃은아이님/ 글쎄 말이죠. 놀랄 일이 아닌데도 아 맞다, 그럴 수도 있는 거였지 하고 어리둥절 했답니다. 아주 오래전 얘기예요
charlie님/ 아, 딱 보시고도 아시네요. 그런데 저도 사진 자세히 보고 뒤늦게 알았는데 정말 진지하게 열중한 모습. 괜히 뿌듯한 거 있죠
란씨님/ 후후 아마 다음번 수강료를 10퍼센트 할인해 주지 않을까 저도 생각했어요. 아무튼 그 소년이 너무 열정적으로 전도(?)를 했기 때문에 진짜 태권도 자체를 얘들이 확신을 갖고 하는구나 싶어서 귀엽게 보이더라구요!
Commented by raoh at 2006/08/13 23:36
저도 한번 미국 태권도 도장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구호는 무조건 한글로 하더군요. 하나, 둘, 셋, 차기.. 등등. 한국이 자랑스러워 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태권도를 사범을 꿈꾸는 고등학생을 만났는데요, 그 학생의 태권도 동작을 보고 또한번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동작이 절도 있고 힘이 넘쳤죠. 언젠가 한국에 꼭 가보고 싶다는 그 학생이 기억 납니다. ^^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6/08/15 00:15
raoh님/ 태권도 동작은 세계 어디에 가나 하나, 둘로 가르치는 것이 정말 멋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얼마전에 '영어로 가르칩니다'라고 쓰인 태권도장 광고를 봤어요. 아니, 그렇담, 세계적으로 하나, 둘이라고 말하는 우리 태권도를 우리 나라에선 '원, 투'로 가르치나?하고 대실망~
Commented by 새벽의 냄새 at 2006/08/27 06:39
아하...평양식당 찾아서 가셨을 정도면 먹는거에 목숨거신분이 아니실까 하는..
쿠쿠.....
그 전의 그 평양식당이 아직 그 자리에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때 먹어본 그 평양쟁반의 맛~ 너무 환상적이 었었죠,,
근데 내가 가본 평양식당 앞의 태권도장은 한국분이 하는거 였는데..
평양식당가서 냉면먹으려 했더니 선배님이 그 도장에서 식당 드나드는 사람 사진찍는 다구 자주가지 말라는 말에...뜨끔했었던...머..그러던 시절이니까요~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6/08/27 16:35
새벽의 냄새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말씀 듣고 보니까 같은 곳이란 생각이 들고요, 평양 식당이 여러 곳일 리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그 도장은 한국 것이었나봅니다. 수령님풍 글씨체와 퇴락한 묘한 분위기에 긴 세월동안 북한 도장이라고 굳게 믿어왔었는데! 세상에 그럼 몇 걸음 거리로 남북한의 밥집과 도장이 같이 있었던 거군요~ 오류가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제 여행기에 그 점을 밝혔습니다. 독일과 유럽에서 유학을 다녀오셨던 분들의 자세한 덧글이 이렇게 상냥하게 올라와서 제 여행기가 더 풍부하고 정확해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bateauivre at 2007/06/09 19:48
으하하 합기도, 국가에 충성은 뭡니까 하하하. 살인 기술로는 쿵푸랑 무에타이도 좋대요. 괜히 "도" 운운하지 않고, 싸움에서 최소의 노력을 들여 이긴다, 가 핵심이라서. 샤올린(소림)을 잠깐 배워본 적이 있는데 살기가 없어선지-_- 열의가 안생기더라구요.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7/06/10 22:19
소림 무술을 잠시 배우시다니 bateauivre님도 저만큼이나 땡기는대로 사시나 봅니다 ^^ 아무튼 도에 연연하지 않고 머리칼을 거머쥐고 그냥 시모노세키...
Commented by 나미너미 at 2009/04/30 16:18
사실 태권을 이리 홀대하는건아니다 싶어여 흔치않은 우리문화유산인데....
동네 학원수업같은이미지로 .기냥 어릴적 잠깐거치는 ....
먼가제대로된 옷을 입혀주는 성의가필요하지않을까...

아아 역시벌건대낮이라그런지 먼가 생각이모아지질안내여...
암튼 나미너미는 소중한문화유산이라면 무조건 보호하고 육성해야한다는 사명감을갈고잇는유전자입네다^^
태권*태권*태권*
Commented by 여행유전자 at 2009/05/11 01:22
세계 곳곳 의외의 장소에서 태권도 도장을 만나면 기분이 참 묘하죠. 지난번엔 관장님도 만나 인터뷰(?)도 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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