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6월 05일
베르사이유의 진짜 주인 / 베르사이유_36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봤던 유럽 배경의 영화를 다시 찾아서 보는 증상을 경험한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내가 갔던 그 장소, 내가 먹었음직한 그 음식이 나오면 화면을 보며 나지막이 주먹을 부르르 떤다. 한 건 해 냈다는 듯이.
나 같은 경우, 첫 유럽에서 돌아와서 아주 오래된 일본 만화인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어렵게 어렵게 구해서 보았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그 옛날 일본인 만화가가 베르사이유 궁전 사진을 놓고 그렸는지, 궁전 건물이나 유명 장소가 실제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오~ 우리의 철 없는 마리 앙투와네트가 연애질을 하던 여신의 정원이라든지...페르젠이 숨어 들었을 미로하며…성 정체성 모호한 우리의 왕실 근위 대장 오스칼이 말을 타시고 누비셨을 바로 그 베르사이유 궁전!

길 끝에서 베르사이유 궁전은 멋진 백마의 마차가 아닌 푸조, 르노의 자동차들이 빽빽한 주차장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여기 앞이 원래 이랬던가...? 잘 기억이 안 난다. 가까이 가 보니 정문 앞에 싸구려 악세사리 파는 잡상인들은 예나제나 똑같다. 흥정에 약해서 사는 사람이 조르는대로 아무튼 팔고 보자는 스타일인 것도 예나제나 똑같다.

베르사이유 궁전에 처음에 왔을 때 나는 화려한 장식도 없이 옆으로만 넓은 궁전 외관에 저으기 실망했었다. 독일 퓌센의 성처럼 뾰족뾰족한 동화 속 공주님의 성을 기대했었는데 실제로 본 베르사이유 궁전은 상상에 비해서 너무나 소박했던 것이다. 그 소박함에 실망하고 너무나 인공적인 프랑스식 정원에 질려버린 나는 궁전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베르사이유 정원이 시작하는 어디 후미진 풀밭에서 잠만 자다 궁을 나왔다.
그 때 다른 친구들은 정원(그게 어디 정원이더냐, 거의 “루이14랜드”라고 할만큼의 거리) 저 먼 운하의 끝까지 자전거를 타고 돌아온 것이다. 약속한 시간에 정문에서 다시 만난 자전거파 친구들은 그 얼마나 자부심 넘치는 감탄을 퍼부었던가. 그리하여 졸다가 탱탱 부은 얼굴로 나타난 나의 가슴은 얼마나 난도질 당했던가.
그래서 2003년에 왔을 때에도 못 다 이룬 그 ‘루이14랜드’의 땅끝 보기를 하겠다고 기껏 기차역까지 찾아갔다가 월요일 휴관에 걸려서 꽝 난 바 있다. 그리고 오늘!
"태양왕 루이 14세가 말 많은 귀족들이 득실대는 파리를 싫어해서 선왕의 작은 별장만 있었을 뿐이었던 뜬금없는 베르사이유에 귀족들의 기를 죽이는 대공사를 벌였다. 원래 이 곳은 그냥 땅도 아니고 억새풀 가득한 습지 황무지였다. 그래서 건물보다는 방대한 인공 정원, 인공 운하, 인공 숲을 만드는 거대 토목공사로서 베르사이유 궁전은 더 의미가 있다"
는 것을 영화 <왕의 춤>을 보면 아주 실감하게 된다.

수 년간의 한을 풀러 와 보니 옛날엔 좀 짜증스럽던 인위적인 모습의 전형적인 프랑스식 정원을 보는 것도 특별한 광경을 보는 기쁨뿐이다. 세월이 내 마음을 조금은 겸손하게 만들었나 보다.
정원이 아니라 궁전 안 구경은 '거울의 방'만 보면 되는데, 마침 '거울의 방'이 공사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주 옛날에 LG에서 출시했던 PC GAME 중에 "1685 베르사이유"가 생각났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배경으로한 어드벤처이자 베르사이유 궁전 관광 게임. 그동안 처음 한 두번 도전 뒤 내 책꽂이에서 오래도록 세월만 보냈던 게임이다.
'베르사이유 그 게임, 집에 돌아가면 꼭 다시 해야지!'

솔직히 이 게임을 해야 그 유명한 '베르사이유'의 '거울의 방'이 왜 유명한 지 알 수 있다. 궁전 속의 넓은 홀인 이 거울의 방은 벽면이 거울로 장식되어 있는데 화려하게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이 거울 벽들 중에 비밀 문이나 비밀 통로였던 것이 한 두 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게임은 실제 베르사이유 궁전의 설계와, 걸린 그림까지 완전히 시뮬레이션이라 요걸 하다 보면 실은 정말 나중에 비밀의 방에 실제 한 번 가 보고 싶어질 정도다. (나는 다녀온 뒤에 이 게임으로 베르사이유 궁전 방들을 완벽 마스터했다)

멀리 보이는 호수 같은 건 스위스 용병의 못으로 불린다. 스위스 용병들이 맨 땅을 파서 만든 호수다. 그리고 그 앞은 오렌지 나무 정원이다. ‘오랑제리’라는 이름…후후 서울 남산 힐튼 호텔 뷔페 이름이다. 아마 귤나무(오렌지 나무?)라는 존재 자체가 서울과 위도가 똑같은 파리 인근으로서는 상당한 구경거리가 아니었겠는가. 음, 이런 지식도 모두... 게임 하다 알게 된 정보…
미로 처럼 생긴 정원 모양. 루이 14세는 정원을 자신이 직접 다 디자인했고 정원 감상 루트까지 자기 손으로 모두 정해 놓았다고 한다. 실제로 숲 중에는 미로의 숲도 있다. 물론 이 모든 지식도 모두 게임에서…
아아! 유럽의 명소 앞에서는 꼭 생각나는 또 하나의 게임, 툼레이더! ‘툼레이더’의 라라가 본 게임을 앞두고 점프 연습을 하던 자기 성 안의 그 미로 정원이 베르사이유 앞 마당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곳에서 모티브를 따 왔던 것이구나.

열심히 돌아보는 내 뒤에서 한국말 몇 마디가 들린다.
“네, 그 가방 저 주세요”
“자, 여기서 사진 찍읍시다”
“다같이 서시고요~”
“이제 각자 개인 사진 찍으시고 차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한국 단체 관광객들이었다. 그들도 예전의 나처럼 베르사이유의 풀 샷만 한 컷 보고 떠나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 생각보다 밋밋한 베르사이유궁과 분수 몇 개에 황량한 저 멀리의 운하에 대해 말 할 것이다.
“베르사이유 별 거 없네”
아, 안돼는데! 아닌데! 베르사이유의 주인공은 건물이라기 보다는 저 넓고도 넓은, 갖가지 종류의 정원인 것을… 지금 사진찍고 돌아서시는 그 계단부터 이제 시작인 것을… 베르사이유의 주인은 우리가 상상하는 마리 앙투와네트가 아니라 태양왕 루이 14세의 루이14랜드였다는 걸 생각하면 규모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것을!
나는 100년 전 궁전 후미진데서 졸았던 죄로, 자전거파에게 도발당했던 염장의 한을 풀기 위해 세월에 뒤늦게 운하 옆을 걷기 시작했다.
# by | 2006/06/05 17:48 | 유럽과 나의 왼 발 (1) | 트랙백 | 핑백(1)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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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nucopia님> 꾀죄죄... 정말 실감나는 단어입니다 :)
어디서 씨디를 구할 수 있을까요- 저도 마스터 하고 싶어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