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내는게 싫은 건 동서양이 똑같아 / 베르사이유_34

베르사이유로 떠나는 기차안 어디선가 뿜빠라 소리가 들려왔다. 방정맞은 색서폰이 헝가리안 무곡을 연주하고 아코디언의 반주가 딸려있다. 경쾌한 멜로디가 점점 크레센도로 빠라라 다가온다. 내가 탄 2층칸 계단을 올라온다. 멀끔한 옷에 멀쩡한 얼굴을 한 리더 아저씨는 기름진 눈웃음을 치시며 -그런데 이런 분들은 왜! 수염 자국을 항상 거무튀튀하게 남겨 놓는 지 모르겠다- 색서폰을 -너무나 쉽게-포기하시고 손을 벌리신다. 그 뒤로 따라오시는 2인조의 일원인 아코디언 아저씨는 경쾌하지만 애수어린 연주를 계속하신다. 맞다. 이런 음악, 이런 사람들.'에밀 쿠스트리차!'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꽤 오래된 영화,
<집시의 시간>

영화 내내 끊이지 않는 집시들의 음악, 경쾌하지만 애수어린 아코디언을 베이스로 한 빠라라 소리와 걱정없어 보이는 걱정스런 인상들.

하지만 이런 거리의 악사가 항상 낭만적으로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그래서 유럽 여행을 다니다보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 온 여행자 누구라도 터득하는 노하우가 있다. 그건 유럽 곳곳에 거리의 악사가 너무나 흔하다 보니 제발 피하고 싶을 때에는 악사와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설사 순간적으로 음악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더라도 눈은 마주쳐서는 안된다. 한 순간이라도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이후로는, 연주를 끝낸 그들이 당신의 눈 앞에 손바닥을 쭈악 펼칠 것을 대비하여 동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돈을 낼 생각이 없다면 그들 사진을 찍어선 예의가 아니다.

사실 연주를 듣고 그에 응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문제는 거리의 악사가 유럽 구석구석 정말 징글징글할 정도로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음의 대비가 안 돼 채 자기도 모르게 무방비 상태에서 악사와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지갑을 열어야 한다. 후후 이 날 여기서 또 한 분의 여자분,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눈이 마주치셨나 보다. 사진 속의 표정을 보니 얼떨결에 돈 내는 것이 싫기는 동서양이 따로 없다.

베르사이유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난 또 다른 사람들, 레미네 가족이다.


왼쪽부터 레미의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아빠 (여기까지 네덜란드인) 그리고 레미, 레미 엄마(는 프랑스인).

내가 한국에서 왔다니까 레미 엄마는 곧 '서울은 가 본 적은 없지만 멋진 도시인 것 같다'고 말한다. 한국이 어디인지 설명을 할 필요도 없이 곧장 서울까지 옮겨간 대화. 그녀는 원래 프랑스인으로 뚤루즈 출신인데 네덜란드인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7년동안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네덜란드인 시댁 가족과 함께 프랑스 여행 중이라고 한다. 내가 '그럼 당신은 네덜란드에서 이방인으로 있다가 지금 고향으로 돌아온 거네요. 고향에 온 것을 축하해요' 그랬더니 얼굴이 활짝 밝아지며 배시시 웃는다.

열차로 한 두 시간이면 국경을 넘는 EU 통합의 시대에 유럽에서 국적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지만 서양의 대도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는 (실은 뚤르즈도 대도시다) 순박한 웃음을 보면 역시 고국은 고국이고 타국은 타국이라는 걸 느낀다. 아들인 레미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헤미라고 불러주니 더 기뻐하는 레미 엄마.

RER 고속 전철은 그렇게 2인조 악사들을 내려 놓고 레미 가족과 나와 그리고 눈 마주친 죄로 입을 삐죽이며 돈을 낸 머스터드색 스웨터의 여자 일행을 태우고 베르사이유에 도착했다.

by hertravel | 2006/06/03 17:46 | 유럽과 나의 왼 발 (1) | 트랙백(1) | 핑백(2)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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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6/07/07 10:4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6/07/08 13:17
비공개님> 네. 반가운 소식이네요. 항상 잘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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