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의 저주 / 파리 루브르_23


처음 루브르 박물관에 갔을 때 내 모습은 한 마디로 '우왕좌왕'이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내 눈 앞에 있어서 이걸 볼까 저걸 볼까 우왕좌왕하다가 이제 겨우 몇 개의 파빌리온을 들렀을 뿐인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 허전한 마음으로 나의 첫번째 루브르 방황기는 그렇게 끝났고 아쉬움이 남았던 나는 박물관을 나서기 전에 루브르 박물관 회화책을 한 권 사면서 엽서도 몇 장 골랐다. 이런 이런, 엽서를 사려고 몇 장 뒤적여보니 보고 싶었던 그림들이 뒤늦게 한 둘이 아니다. 그렇게 '명상하는 철학가' 엽서는 내 손에 들어왔다. 한국에 돌아 와서 유럽 여행 사진을 정리하면서 램브란트의 이 그림을 보면 항상 '보고 오지 못 한 유럽 여행의 아쉬움'에 작은 한숨을 쉬곤 했다. 그 후 긴 시간이 지나 나는 지금 엽서가 아닌 루브르에 걸려 있는 '명상하는 철학가' 그림 앞에 서 있다.



램브란트의 작품은 항상 나에게 그림 이상의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램브란트의 그림이야 명작이 한 둘이 아니고 유럽 각국의 곳곳 미술관에 골고루 분포돼 있어서 루브르가 특별히 램브란트 그림으로 유명한 것은 아니다. 자화상이라든지 엠마오로 가는 예수님 같은 작품이 루브르의 램브란트 대표작이다. 그런데도 내가 특히 이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램브란트의 그 여러가지 자화상 중에서도 나이 든 얼굴을 그린 자화상이 좋고, 성서화 중에서도 노인이 나오는 그림을 더 좋아한다. 아마도 그림 속의 늙은 남자가 선지자든, 방탕한 아들이 돌아온 것을 껴안은 늙은 아버지든 누구든, 램브란트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 그게 이유인 것 같다. 젊은 시절의 램브란트는 돈과, 멋진 집과,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와 아이들을 낳고 살았지만 중년 이후 그는 집도 돈도 잃고 사랑했던 아내는 일찍 죽고 아이들은 어려서 죽는 인생의 광야에 서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차분하고 겸손하게 그려지는 후반기의 성서화나 노인의 얼굴을 볼 때면 램브란트의 고단한 인생과 성숙한 신앙을 지켜보는 것 같은 잔잔한 감동이 내 가슴에 울림을 준다.



루브르 박물관은 그 유명한 모나리자가 있고 승리의 여신 니케 상이 있고 미의 상징 비너스가 서 있는 유명한 곳이지만 그 세계적인 유명세나 규모에 비해 루브르가 소장한 그림은 조금 떨어지는 것 같다. 나는 그래서 항상 '루브르, 여긴 미술관이 아니라 박물관이군' '그림을 보러 오는 데가 아니라 접시를 구경하고 미이라를 보는 곳이야' 하고 정의를 내린다. 도대체 이 근거없는 오만방자는 어디서 나온 거란 말이지? 오늘도 나는 '역시 루브르는 아무리 봐도 그림이 딸려~!' 라는 오만 방자가 만발한 교만을 떨다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벽에도 귀가 있다고 했다. 나의 교만 방자한 혼잣말을 루브르의 노회한 그림들이 들었던 건가. 루브르가 나를 확실하게 한 방 먹인 것이다. 몇 년 전에 왔을 때 꼭 보고 싶었던  3층의 쉴리관과 여러 멋진 회화가 있는 곳에 들어가려는데 모든 입구가 막혀 있었다. 그 많은 전시관 중에서 하필이면 그 전시관이 돌아가면서 쉬는 순서에 걸린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딱 그 전시관들만 못 보고 눈물을 삼키고 돌아왔었다. 사실 딱 거기만 보려고 돈 내고 간 거였는데 말이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일이. 이제 몇 년만에 돌아온 나는 표를 끊자마자 당연히 그 전시관쪽을 향해 거침없이 찾아 들어간다. 그런 내 앞에 루브르가 자존심을 걸고 입장을 불허하는 멋진 설욕의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니 이게 웬 금줄?
설마...
설마...

"이 전시관 왜 막혀 있나요?" 하는 나의 질문에
"아, 오늘은 그 전시관 쉬는 날이예요. 내일은 열립니다."

".........................."


이건 또 무엇인가. 고마운 줄 모르고 속으로 흉을 보고 다닌 나에게 루브르가 한 방 날리는 복수? 아니면, 올 때마다 그 전시관을 막아 놓는, 이것도 세상에 그 수많은 저주 시리즈 중의 하나인가, 루브르의 저주?


           (전시물 뿐 아니라 박물관 창 밖으로 보이는 파리의 모습도 매력적이다)

by hertravel | 2006/05/23 17:32 | 유럽과 나의 왼 발 (1) | 트랙백 | 핑백(2)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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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ㅈㅗㅅㅓㅇㄱㅕㅇ at 2009/08/28 18:11
여행유전자님 오랜만이에요~ 저 어제 까지 파리에 있었는데, 램브란트 저도 좋아해요! 그 철학자 그림도 정말 좋아서 포스터를 사고 싶었지만 못 찾았어요. 저는 수요일 목요일 계속 아침 9시부터 가서 봤는데 그게 사람도 없고 가장 좋더라고요.
Commented by 여행유전자 at 2009/08/31 02:04
안녕하세요 ㅈ ㅗ ㅅ ㅓ ㅇ ㄱ ㅕ ㅇ님-
이틀 연속 아침부터 미술관을 찾으며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상상만으로도 부자가 되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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