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고 보니 유령의 집 / 파리 샹피옹 수퍼_21

챔피언 수퍼-샹피옹 쉬페흐마흐셰-는 파리에 올 때마다 내가 즐겨 들르는 수퍼가 됐다. 배낭여행을 하는 사람에게 샹피옹같은 수퍼마켓은 싸고 싱싱한 먹을거리의 보물창고다. 샹피옹의 생식품 코너에는 그 크기가 방울 토마토보다 조금 더 큰 자잘한 양파가 매달려 있다.

불현듯 인도의 '라무'가 생각났다. 라무는 인도 카주라호 동네 식당에서 만났던 열 살 쯤 된 인도 소년의 이름이다. 문이 열려 안이 보이는 식당 바닥에 라무는 앉아서 작은 칼을 손에 쥐고 아침 내내 양파를 까고 있었다. 우리나라 양파처럼 크지 않고 알이 자잘한 양파를 요리에 쓰려면 인도의 부엌에서는 누군가 손이 많이가고 성가신 양파까기를 도맡아서 해야할 것이다. 눈이 맵기도 하고 손도 아플텐데도 아이의 표정은 참 순하고 맑았다. 그런 아이들을 만나면 뭘 어떻게 잘 해 주고는 싶은데 돈이나 물건을 주는 것이 정답은 아닌 것 같고 아, 어떻게 해 줄까, 뭘 해 줄 수 있나, 괜히 마음으로 안달이 나곤 하지만 제 3세계 아이들 후원 결연을 맺는 것외에는 별다른 좋은 방법을 아직도 알지 못 한다. 알이 작은 양파가 내 생각을 파리에서 유럽대륙을 횡단하여 인디아까지 달려가게 했다. 다시 여기는 프랑스 파리의 플라스 디탈리의 샹피옹 수퍼마켓이다.

샹피옹 수퍼는 대중적인 와인을 사기에 딱 좋은 곳이다. 와인 코너는 보르도 지방, 론 지방, 불고뉴 지방, 이런 식으로 지역마다 코너가 따로 있다. 일단 한국에서도 흔한 무똥 까데mouton cadet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좋아하는 와인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가격과 비교하기 딱 좋았다. 우리나라에서 최하 2만 8천원 한다. 압구정 까페에서는 7만원에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 샹피옹엔 9유로에 나와 있었다. 우리 돈 만 원이다. 와, 이건 까페와 비교한다면 7분의 1 가격이 아닌가! 1유로에 울고 웃으며 다니는 배낭 여행이라도 내가 파리에 와서 와인을 마셔야 할 이유가 바로 이거다. 그 땅에서 먹는 그 나라 와인의 맛과 가격! 이번엔 샤토 달마약chateau d'Armaihac을 발견했다. 23유로. 3만원도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 최하 8만 6천원에 나와 있는 것을 보았었는데. 백화점같은 데에선 20만원은 나갈 것이다. 아무튼 우리나라에서는 와인이 엄청나게 호사스런 취미로 변질된 것 같다. 프랑스에선 이렇게 수퍼에서도 신나게 집어 들고 갈 수 있는 이쁜 것들이 착한 가격으로 서 있는데 말이다. 아니면 일본 술집에서 보는 비싼 한국 소주 사정과 피장파장인건가.


흐뭇하게 손에 들고 숙소에 와서 밥 먹고 난 다음 식탁에 올려 음주의 장을 연다. 맛있는 와인은 서너명이 함께 마셔야 더 좋다. 민박집 주인 유학생분과 함께 마시는데 그윽하다. 맛있다. 와인 상태가 정말 좋다. 확실히 배타고 오면서 적도 넘어가며 한 번 부글부글 끓어주고 온 것과는 다른 거다. 그런데 맛있는 와인의 힘이 생각지도 않은 이 민박집의 숨겨진 사연을 듣게 해 줬다.

지금 나와 같이 와인잔을 기울이는(?) 민박집 주인 유학생분이... 이 민박의 주인장이 아니었던 것! 그냥 주인이 아닌 것 뿐 아니라 나와 같은 여행자였던 것이다. 알고보니 이 가짜(?) 주인장은 프랑스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미국 유학생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잠시 프랑스에 들러 북 아프리카나 한 번 돌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여기 파리 민박을 하는 사촌 동생을 찾아왔다가 사촌 동생(이 진짜 주인장)이 갑자기 일이 생겨 한국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임시로 이 집을 맡아주는 중이었다는 것. 후후후 아무리 여행자들보다는 파리에 더 머물렀다고는 하나! 파리에 자주 놀러왔다고는 하나! 엄연히 똑같은 여행자인 그에게 사람들은 오며 가며 '파리에서 어딜 가야 뭘 하죠?' '뭐가 어떻게 되면 프랑스에서는 뭘 해야 하나요?' 질문을 날리며 살아있는 지식인 검색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고보니 이 날 아침에도 여자 세 명 놀러온 팀이 이 분 붙들어 놓고 뭔가 묻고 있는 것 같았는데. 킥킥 웃음이 나온다. 이분이 그 때 뭐라고 대답을 해 줬더라? 그렇다면 음식을 해 주는 저 분은 그럼 누구고, 저기 왔다 갔다 하시는 저 분은 누구인가요? 물어보면 물어볼수록 요지경이다. 음식을 해 주는 분은 어떻게 친구분이고, 저기 주인 분위기 엇비슷했던 사람들은 영국 유학생으로 여기 주인과 친해서 프랑스로 놀러 나온 사람, 그 옆의 사람은 그 사람의 누나, 뭐 이런 식이다.

아아아 이 집, 유령 민박이었다. 주인 없는 집에 손님만 모여 있었던 것이다. 손님이 밥을 지어 새 손님을 먹이고 새 손님이 떠나면 또 다른 새 손님이 찾아 든다. 새 손님은 밥 지어 주는 손님이 주인인 줄 알고 있으나 실은 주인은 지금 손님들이 떠나오신 한국에서 프랑스 민박집 경영의 시름은 다~ 잊으시고 참이슬에 계란말이 케첩 발라 드시고 계신 것이다. 손님으로서는 처음으로 내가 이 사실을 아는 거라고 한다. 이게 다 샤토 달마약의 진실 탐지 능력이다.

주인장 없는 유령 민박에서 그렇게 손님들만 모여 영국의 유학생 분이 전해주는 웃지 못 할 사건과 실화 이야기에 배를 잡고 뒹굴었다. 유럽의 비둘기를 잡아 먹는 중국인들 이야기와 고양이용 참치 캔(인 줄 알면서도 아껴 먹는)아프리칸 이야기 같은 경험담과 유학 생활 무용담과 '세상에 이런 일이'류의 이야기들...결혼은 하기 싫고 아기는 낳고 싶어하는 영국 여자들이 손쉽게 노숙자 아저씨들을 애용(?)하는 바람에 영국의 노숙자 아저씨들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 여자들에게 끌려가서 잠-을 자는 일이 자주 있단다. 한 마디로 돈은 없어도 여자는 끊이지 않는다는 영국 노숙자 아저씨들 이야기를 듣는 것을 끝으로 나는 와인으로 검붉어진 입술도 닦지 못하고 잠들었다.

by hertravel | 2006/05/21 17:31 | 유럽과 나의 왼 발 (1) | 트랙백 | 핑백(2)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hertravel.egloos.com/tb/2068267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Linked at HerTravel의 지구 한 .. at 2007/07/08 13:18

... bsp; 루벤스씨, 너무 야해요!_24 루브르의 저주_23 홍합 요리와 노래하는 샹젤리제_22 마시고 보니 유령의 집_21 파리 한구석에 숨은 한국전 참전비_20 이명박 시장과 파리 시청_19 어느새 꽤 유명한 마레 지구②_1 ... more

Linked at HerTravel, 여행유전자.. at 2008/01/03 13:01

... 잃지 않고 4년을 장수하시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가사상태에 빠지셨다. 또 다른 유럽 여행을 파리에서 시작한 첫 날, 그 먼 차이나타운까지 짐을 질질 끌면서 들어갔던 민박집에서의 일이었다. 민박집 컴퓨터에 연결한 나의 이 몹쓸 튼실함을 자랑하는 디카께서 갑작 절명을 하신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이러스 잡수시었다.)그리하여 헐래블 ... more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