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5월 13일
"부 망제 보꾸" 많이도 먹는다 / 파리 플런치 식당_13

스테이크나 치킨 같은 주 메뉴 요리 + 음료수, 혹은 주 메뉴 요리 + 사이드 메뉴 양껏 접시에 뜨는 데 각각 7.90유로면 먹을 수 있다. 나는 주 메뉴 요리 없이 그냥 샐러드만 골랐다. 그런데 이상하다. 계산대에서 액수가 더 많이 나온 것이다. 액수가 따로 써 있는 작은 접시 포장 음식들은 피해서 골랐는데도 왜 이 가격일까? 캐쉬어에게 물어봤더니 접시에 따로 랩으로 포장되지 않았지만 삶은 달걀은 따로 돈을 더 받는다고 한다. 그러고나서 내 접시를 보았더니 달걀이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올라있다. 노란자는 골라 내고 흰자만 먹는 습관때문에 갯수 개념도 없이 담았던 모양인데.
'음 그런데 그나저나 웬만한 메뉴는 다 싸다면서 달걀 가격은 왜 이렇게 비싼 거지?'
'달걀이 고급 음식도 아닌데 뭐 이런 걸 돈을 받지?'
이런 이런...양계장의 닭이 무수하게 낳아대는 그 알 한 두알에 이렇게나 마음 상하고 민망해 하다니.

(내 것은 샐러드 메뉴에 달걀 두 알 지불, 오른쪽은 너부리의 것으로 전형적인 7.90유로 세트)
달걀 두 알에 대한 비용을 추가 지불하고 자리에 앉았으니 이제 배 터지게 먹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자리에 앉아 먹으려고 뒤적이다보니 달걀이 둘도 아니고 셋이다. 한 알이 야채 샐러드 밑에 참하게 들어 앉아 있었다. 한 마디로 돈도 안내고 달걀 하나 몰래 밀반입한 셈이다. 어이구 이거 민망해야 하나 흐뭇해야 하나. 룰룰루 신나게 먹기만 하면 되는데 자꾸 '달걀 세 알을 한 방에 먹으려 한 위대한 여인'이 된 듯 살짝 민망함에 볼이 발그레해지며 2003년의 악몽이 떠올랐다.
2003년 한 여름, 101년만에 찾아온 유럽의 살인 폭염이라는 그 태양 아래로 나 hertravel과 아라치, 모니카는 유럽을 마구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파리의 람부토 거리의 바로 이 플런치 레스토랑에서 그 날도 2년 뒤의 오늘처럼 열심히 쌓아 올린 접시를 앞에 두고 배낭 여행의 굶주린 배를 꽉 꽉 채우려는 열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수퍼에서 양상추와 토마토와 빵과 생수를 사 먹으며 그것을 주식으로 중부 유럽을 돌아나온 우리였다. 우리 앞에 각자 하나씩 쌓여져 있던 음식 더미는 끝내 흔적없이 사라졌다.

싹쓸이: /싹 쓸어 버린다는 뜻으로/차지해야 할 것이나 없애야 할 것을 남김없이 몽땅 차지하거나 없애 버리는 일.
그랬다. 사전에 나온 '싹쓸이'의 뜻은. 우리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배낭 여행자의 한맺힌 포식 퍼포먼스로 싹쓸이를 끝냈다. 그리고 봉그레 솟은 배를 살짝 어루만지며 흐뭇해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우리들 옆으로 프랑스 할아버지 한 분이 지나가시다 발길을 멈추시고는 활짝 웃으며 한 마디를 던지신 것이다.
"부 망제 보꾸!... 하하!"
불어를 배울 때 심지어 우리를 가르치셨던 불어 선생님 당신 조차도 불어는 여성 명사 남성 명사가 골치 아프지...불어 동사 변화를 알려면 동사의 종류까지도 알아야 하지...동사의 종류에 따라 활용어미가 달라지지...그래서 무조건 외우자고 우리 학생들을 달래 가시며 가르치시던 즈쉬 뛰에 일레 엘레 누쏭 부제 일쏭 엘쏭. 몇 번을 외워도 그 얼마나 어렵기만 하던 불어였던가. 다시 한 번 강조하자, 정말 그 놈의 불어, 얼마나 어려웠던가.
그런데, 왜! 왜? 어찌하여! 그 어렵던 불어를 입에 안 올린지 백만년이 흘렀건만 어째서 저 프랑스 할아버지의 키득거리는 저 한 문장을 단번에 알아듣겠느냔 말이다.
"Vous mangez beaucoup!...haha!"
"많이도 먹는다!...하하!"

2003년 '많이도 먹는다' 사태 이후, 모든 것을 내게 유리한 쪽으로 선별적 기억을 허하는 습관으로 완전 잊어먹고 지내왔던 그간의 나날들. 그러나 아무 생각없이 담아왔던 2005년의 플런치 내 접시 위의 든든한 달걀 세 알, 그것도 한 알은 밀반입 해 온 무게감 있는 음식을 보니 '많이도 먹는다'의 아픔이 되살아나며...남들도 이렇게 묵직하게 한 방 달걀 세 알 먹는 여인이 있을까 혼자서 낯이 발그레 민망해진다.
# by | 2006/05/13 17:25 | 유럽과 나의 왼 발 (1) | 트랙백 | 핑백(1) | 덧글(4)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파리의 만남의 광장, 레알을 가다_16 퐁피두 증후군_15 파리의 짧은 이야기 셋_14 "부 망제 보꾸" 많이도 먹는다_13 밀크 코코아 에펠타워_12 차이나타운 언니의 熱情的 親切_11 별의 광장과 루이비통 알바_10&n ... more
어쨌거나 너무 민망했어요~!
옆에서 저를 구경하고 있던 개구리 아저씨가 궁금해 했었죠. 김이 뭔지... 프랑스어 한마디 못하는 저와 한국어나 영어 한마디 못하는 그 아저씨가 의사소통하느라 한참 진을 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