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찬 바람 부는 파리_4

내 기억 속엔 두가지 유럽이 있다. 유럽이 내 유전자에 첫사랑으로 새겨졌던 그 해, 혹은 2003년 백 년만의 기록이라며 한 여름 더위로 불타던 유럽, 그리고 1998년의 차갑게 가라앉은 겨울 비 속의 유럽. 나는 기억 속 세 모습의 유럽 중에서 순전히 내 마음대로 내 입맛대로 화사했던 여름 장면만을 골라 놓고 내가 사랑하는 유럽의 인상으로 임명했었다. 그런데 오늘 가을의 파리는 그 여름의 빛이 져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한적하게 가라앉는 느낌에 몸과 마음이 추워진다. 여행자로 오는 사람은 이전의 나처럼 파리의 여름을 맛보며 짧은 며칠을 살고 제 나라로 돌아가고 거주인으로 사는 사람은 그 대부분의 달력을 점령한 쓸쓸한 이 날씨들을 받아들이며 살겠지

살짝

햇빛이 더 필요하다. 나에게 세로토닌이 더 필요하다. 1998년의 겨울비보다는 따뜻하다 생각하자. 이 스산함도 곧 낯익은 차분함이 되어 갈 것이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한 순간 찬바람이 불었고 빗방울도 호드득 정수리에 찬 물방울 떨어뜨린다. 저마다 집으로 빨리 가고픈 건가. 차들이 성급해진다. 누군가의 집인지 사무실인지 노랗고 불그런 불빛이 갑자기 부럽다. 시월말의 파리는 참을성없이 쌀쌀하구나. 성냥팔이 소녀는('소녀'라니 어림없는) 여행자로 재림, 얇은 옷을 원망하며 서 있다.

by hertravel | 2006/05/04 17:10 | 유럽과 나의 왼 발 (1) | 트랙백 | 핑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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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첼로♡ at 2006/08/28 21:48
글을 참 잘 쓰시네요^^ 저도 여행 갔다 온 것 정리해야 되는데 hertravel님의 글 읽으면서 괜히 묻어가고 있네요 :)
Commented by hertravel at 2006/08/28 22:54
첼로♡님/ 고맙습니다. 여행기 정리가요, 두편까지만 재미있고 그 다음엔 더 쓰기가 힘들죠? 저도 직업에서 비롯한 뒷심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써오기 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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