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의 악질 잡범, 빈대에게 물린 그 뒷 이야기.


여행 중에 다리가 부러진 적도, 귓병에 걸린 적도, 옷 속까지 파고드는 메뚜기 떼를 만나 여행을 포기해 본 적도 있다. 나의 다리를 부러뜨린 불규칙 돌계단이나 인도의 메뚜기떼들을 여행길의 강력범이라고 한 번 비유해 볼까나. 그렇다면 생각보다 더 자주, 교묘하게 나의 여행길을 망쳐 놓는 악질 잡범의 타이틀은 단연 빈대에게 돌아간다. 잠든 여행자의 더운 피를 빨아 먹고 또 빨아 먹고 조금 움직였다 또 빨아 먹는 그 악질 잡범에게 나는 얼마전 9월의 여행에서도 피를 털렸다. 이 글은 지난번에 올렸던  빈대 물린 여행(클릭하면 원글 창이 열립니다)의 뒷 이야기다.


숙소 침대에 누웠는데 무엇인가 본능적으로 불쾌한 것이 있을 거라는 직감이 온 몸을 뚫고 지나갔다. '동물'로서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적 감각이 서기 2009년의 나에게도 짐승처럼 살아있었다. 그 날, 난 처음엔 그것이 모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모기를 한 마리 잡기도 했다. 나의 베갯잇엔 빨간 핏자국이 남았다. 그러나 모기의 죽음 이후에도 난 밤새 스물스물 온 몸의 불쾌감과 가려움에 잠을 못 이루고 아침까지 뒤척이다 일어나야 했다. 하얀 침대 시트 가장자리에 까맣고 작은 벌레가 있었다. 급한 마음에 시트 끝을 잡고 눌렀더니 작은 핏자국이 생겼다. 

빈대가 옮겨붙었을만한 옷을 반은 버리고 반은 밀봉하고 나니 혹여 공적인 일로 사람을 만나야 할 일이 생기면 입으려고 가져온 검은 원피스만 남았다. 빈대 덕분에 뜻하지 않게 드레시한 옷차림을 하게 됐군 그래. 나는 숙소 체크 아웃을 했다. 담당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화를 낸다는 생각은 없었고(상습적인 곳이 아니라면 이 전의 손님이 벌레를 옮겨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부는 해야할 것 같았다. 나야 이미 물리고 뜯겼지만 내 다음으로 그 방을 쓰게 될 누군가를 위해, 그리고 혹시 내가 옮겨온 것으로 나중에라도 오해받고 싶지 않아서 꼭 말을 하고 가야할 것 같았다. 빈대는 시트를 간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매트리스, 침대틀 소독도 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어젯밤은 악몽이었습니다. 

담당자는 내 말에, 악몽이라니요, 라고 물으며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밤새 가려워서 끔찍하고 엉망진창인 밤을 보냈습니다. 아침에 침대를 보니 작고 검은 벌레가 있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벌레였습니다. 그 방은 꼭 소독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군요.

담당자는 내 방 번호를 묻고는 자기가 나와 함께 그 방을 보아도 되겠냐고 했다. 나는 그와 지난 밤의 현장을 다시 찾았다. 피가 많이 묻은 것은 모기, 가늘고 길게 묻은 것은 그 벌레라고 설명했다. 그는 다시 로비로(사실 로비가 있다고 할 만한 호텔은 아니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신들이 내게 숙박비 환불을 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리고 숙박비를 환불해주었다. 사실 나는 환불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정당한 돈을 내고 잠도 자지 못하고 벌레에게 피만 뜯겼으므로 내가 돌려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프랑스 파리의 드골 공항은 출국장에 이런 의자를 두어 긴 비행 전 여행자가 다리를 뻗고 쉴 수 있게 해 놓았다. 이것 말고도 돈을 받고 어깨와 등을 맛사지 해 주고 산소를 마시는 샵이라든지 심지어 요가를 하며 쉴 수 있는 방도 있다. 공항을 비즈니스적인 공간에서 륄렉스의 공간으로 느끼게 하는 목표를 갖고 있는 듯... 아. 물론 누가 설마 진짜 이마를 쓸어주러 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자신의 호텔에 이런 일은 처음이며 하필 그런 불쾌한 경험을 내가 이 곳에서 겪게 되어 미안하다며 다음에 다시 이 도시를 오게된다면 그 때 꼭 다른 호텔이 아닌 이 호텔에 다시 묵어달라고. 나쁜 기억이 아니라 좋은 기억으로 자기 호텔을 기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이름있는 별 몇 개 호텔이라 그렇게 점잖게 대응한 거라면 그러려니 했겠다. 그러나 '호텔'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지점이 데스크에 평상복 직원 단 한 명이 자리를 지키는 그런 숙소다. 일행이 2명 이상이라면 같은 방조건의 호스텔과 가격이 다를 바 없는 그런 곳이다. 그러나 매뉴얼의 대사가 워낙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 날 담당자가 훌륭했던 것인지, 아무튼 손님의 의견에 귀기울여 대응한 점이 지난 밤의 악몽을 일부 잊게 해 주었다.

어떤 민박집에서는 동네를 돌아다니다 들어오는 고양이 탓을 하기도 하고, 어떤 집은 '이상하다~ 전에는 없었는데.'를 너무 강조하면서 되려 나를 의심하는 듯 말해 억울병을 만들어 주기도 했었다. 어떤 호스텔에서는 데스크의 여자의 잘못된 요구를 정정하느라 가타부타 따져서 승소했는데 막상 자다가 벌레 침공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 땐 '이 여자가 일부러 시트에 벌레를 풀었나?'라는 상상의 나래를 혼자 펼쳐보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자주있다 보니 이렇게 상식적인 대응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마음이 부드럽게 녹고 말았으니 아마도 다시 그 저렴한 저가 호텔 체인점을 예약하게 될 듯 싶다.

그리고 앞으로도 벌레나 호텔에 관련된 일이 아니더라도 정정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나는 철저한 학습효과의 제자가 될 것 같다. 분명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가져온 옷 중에서 가장 드레시한 옷을 입고 조용한 억양으로 지나가는 말로 당부를 할 것 같다. 물론 아아아주 가끔 상식 이하로 대응하는 사람에게는 정신을 잃되 고함은 치지 않는 선에서 (그러나 고함을 치기도 한다 ㅠ ㅠ) 아시아인의 무서운 외꺼풀 눈으로 끈질기게 집요하게 따지는 내 본연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  

서술적인 긴 글이었지만 여행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 같아서 담담하고 조밀하게 기록해본다. 글만 읽기 심심하니 몇 장의 사진과 함께.

by 여행유전자 | 2009/11/04 09:37 | 유럽, 프랑스의 시골아닌 시골 | 트랙백 | 덧글(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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